만화, 좋아하시나요? 저는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열과 성을 다해 소비하는 정도는 아닙니다. 가볍게 보고 있어요. 만화라는 형식이 가볍다는 의미는 당연히 아니지요. 저의 소비 방식이 그럴 뿐입니다. 제게는 책이나 영화를 볼 때 어깨가 굳도록 힘이 들어가는 경향이 있는데요. 만화를 볼 때는 다릅니다. 오래된 습관 탓인지 편한 자세로 볼 수 있더군요.
편한 자세로 가볍게 보고 있지만 항상 놀랍니다. 정지된 그림의 연속만으로 서사를 진행한다는 점과 그것만으로 충만한 재미와 감동을 준다는 점에서요. 어쩌면 만화야말로 행간이 가장 많은 형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컷과 컷 사이를 상상으로 채우며 그림 속 이야기에 매료돼 있다 보면 세상 어딘가에 그림 속 세상과 인물이 존재하리라는 달뜬 오해도 품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만화는, 문학이나 영화는 물론 미술과도 차별화된 매력을 가진 듯합니다.
물론 저는 만화에 관해 말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림 실력보다는 이야기의 밀도와 연출의 감각이 좋은 만화를 만드는 기준이라는 믿음이 있을 뿐이지요. 그것은 독자로서 만화를 선택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다만 초반 몇 편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기준이므로 작품 선택에 특별한 요령이 없다고 말씀드려야 더 정확한 설명이 될 것입니다. 그저 서사적인 재미나 시각적인 즐거움(특히 귀여움)을 경험할 것 같은 예감이 들면 보기 시작하니까요.
만화를 좋아하지만, 만화책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가마득합니다. 어릴 적엔 대여점에서 만화책을 빌려 와 집에서 보고는 했는데요. (아직도 대여점이 있나요?) 지금은 종이책 대신 웹툰으로 만화를 만나고 있습니다. 만화책과 달리 웹툰은 ‘이탈’이 더 자유롭습니다. 보다가 흥미를 잃으면 곧바로 다른 작품을 찾아보는 것이지요. (영상 구독 서비스를 이용할 때처럼요)
이탈의 기준은 언어의 쓰임에 있습니다. 커뮤니티 사이트나 소셜미디어 속 공격적인 게시물이 떠오를 법한 거칠고 품위 없는 언어로 쓰인 작품은 보기를 멈춥니다. 논리 구조나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난데없이 폭력적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소재가 흥미롭고, 유명한 작가가 쓴 작품이라도 예외는 없습니다.
욕설과 비속어를 썼다거나 상스럽게 말하고 행동하는 등장인물이 나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극만을 위해(관심을 받기 위해, 라고 써도 되겠지요) 언어의 품위를 배제한 경우가 제게는 문제로 다가옵니다.
만화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에요. 형식이 무엇이든, 언어의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그릇된 표현으로 쓰인 작품을 저는 멀리합니다. 재미는 순간이지만, 언어는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생각의 도구이기도 해서 잠재의식까지 침범할 수 있겠습니다) 오염된 언어가 의식과 무의식에 스며들면 저의 일상도 염오(厭惡)로 가득해질 것 같아서 경계합니다. 언어를 함부로 쓴 작품을 습관처럼 멀리하는 것은 경계의 결과일 테고요.
국어를 공부하는 순간부터 이런 습관을 들인 건 아닐 것입니다. 제가 쓴 글에도 오염된 언어가 얼마간 담겨 있었을 테고요. 스스로 언어 검열 수위를 높인 것은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듯합니다. 그러면 저는 무엇 때문에 변한 것일까요.
정신 이론에 관해서는 거의 모르지만, 인간의 성격이나 행동이 생존에 유리하게 맞춰진다는 의견은 동의하는 편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언어의 오염을 막기 위해 애쓰는 이유도 생존 때문일 수 있겠지요.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저는 언어의 품위를 져버린 작품을 피해서라도 저의 언어를, 태도를, 일상을 지키고 싶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저의 신념인지도 모르겠군요.
신념 이야기를 한 김에 은근슬쩍 오늘 편지의 주제를 말해볼게요. 제목 그대로 신념과 혁명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하는데요. 웹툰을 보다가 발견한 주제입니다. 박태현 작가님의 《버닝 이펙트》(카카오웹툰, 2017~2021)라는 작품인데요. 저는 완결된 지 2년이 지나고서야 이 작품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죄를 지은 이에게 죄의 경중과 관계없이 즉결심판이 이루어지는 세계가 있습니다. 빵 하나를 훔쳐도 그 자리에서 사형당하고 맙니다. 이러한 법 집행에 대항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이를 ‘혁명단’이라고 부릅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세계를 보호하고 범죄율을 낮추기 위해 폭력으로 죄를 처단하는 집단과 그것을 막으려는 집단 간의 대결. 그러니까 신념의 대결이 작품의 주요 골자입니다. 물론 중심 서사가 따로 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오늘 함께 이야기해 볼 주제가 이 요약 안에 있으므로 작품 설명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작품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혁명이란 상대의 신념을 바꾸는 일이다.” 여기서 상대란 당연히 대치하는 인물인데요. 저는 이 대사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상대의 신념을 바꾸는 건 혁명에 비할 만큼 어렵고 대단한 일이니까요.
‘혁명’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여러 뜻이 나옵니다. 세 번째 정의에 눈길이 가는군요.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 그러므로 혁명은 평화보다는 대립에 가까운 단어인 듯합니다. 설명에 쓰인 단어―‘이전’, ‘관습’, ‘단번에’, ‘새로운’, ‘급격하게’―만 보더라도 그렇게 느껴집니다.
실제로도 신념은 대립하기 쉽더군요. 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밤에 지인을 만났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이어갔지요. 그런데 특정 주제에서 서로의 신념이 다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즈음 저는 이제 웬만한 일에 화내지 않고, 타인의 다름과 쉽게 부딪치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오만한 착각이었는지 금세 알게 되었고요.
우리는 목소리를 높였고, 얼굴을 붉혔습니다. 시간이 늦어서 적당히 마무리 짓고 헤어졌는데요. 암담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상대가 저와 다른 신념을 가졌다는 사실보다(사실 그건 알고 있었고요) 순간을 참지 못했다는 게 부끄러웠습니다.
생각이란 다를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게 정상이고, (정상의 범주 역시 사회의 합의보다는 각자의 신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데 저는 생각의 다름을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정답이 아닌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상대의 말에 반복하려고 열을 냈다니. 지금 돌이켜 봐도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대전에서 얼굴이 빨간 채로 손부채 하는 사람을 보신다면 그것이 저일 것입니다)
상이한 신념은 공존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공존이 어려운 까닭은 다른 신념을 드러내는 순간, 서로가 혁명단이 되어버리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대의 신념을 바꾸려고 드는 것이지요. 왜? 나와 다른 당신의 생각은, 내 생각에 틀린 것 같거든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신념의 대립을 말하기에 가장 적합한 주제는 아무래도 ‘정치’이지 않을까 합니다. A라는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과 B라는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의 신념은 대립할 가능성이 큽니다. 양당제 사회라면 더욱 그럴 테고요.
대표적인 양당제 국가라고 한다면 미국을 들 수 있겠습니다. 혹서를 보니, 미국 시민들은 정당 일체감(자신이 선호하는 정당과 자신을 동일화하는 마음)이 상당히 높아서(정확한 수치는 기억나지 않네요) 자신과 반(反)하는 편에 선 사람들을 적대하기 쉽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습니다. 미국에 살지 않아서 그들의 적대감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선택지도 거의 둘 중 하나이며 다른 정당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적대시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우리가 가진 정치 신념을 정치 성향이라는 말 대신 정치 편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각자가 편향된 정치 신념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지요. 양당이 아닌 다른 당을 지지한대도 그저 또 하나의 정치 편향을 가졌다는 의미일 테고요. 어느 쪽에도 편향되지 않은 중도도 있다, 고 말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평소엔 그럴 수 있겠지요. 그런데 선거라면 다릅니다.
정치 신념이 어느 한쪽으로 편향돼 있지 않더라도 내가 가진 표는 하나일 뿐입니다. 중도라고 해도 어딘가에 투표했다면, 그 선택은 일주일 뒤에 무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떤 선택은 몇 년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까지 바꾸기도 하고요. 그러한 선택을 한 뒤에 나는 중도라고, 어느 쪽에도 힘을 싣지도, 영향을 주지도 않았다고 말한다면 무색할 따름이겠지요.
어찌 됐든 자신의 신념에 따르는(지지하는) 일이 적을 만들게 된다는 점은 서글픕니다. 정치가 사회의 이익과 혼란을 협의하는 일이라면 과정에서의 대립이야 불가피하겠지만, 한 국가에 사는 시민이 이 정도로 멀어져야 한다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갈등을 부추기는 언론이 문제일 수도 있겠습니다. 갈등은 문제 해결의 요소가 아니라 과정인데, 갈등만 부각하여 ‘장사’하는 사례가 많아 보입니다. 언론에도 나름의 사정이야 있겠지만 그 결과(폐해)를 사회 전체가 감당해야 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언론에만 핑계를 몰아두려 건 아닙니다. 언론도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뿐이지요. 아시다시피 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않으면 우리가 정확한 사실을 알기 위해 아무리 노력한들 허사가 됩니다. 각자 편향된 사실만 계속 취하게 될 테니까요. 그로 말미암아 시민 각자가 내집단에 집착하고, 외집단을 혐오하게 된다면. 우리가 할 일은 영원한 다툼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미, 그 다툼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고요.
정치로 예를 들었지만, 신념의 대립은 일상적인 일이며 그 정도가 날로 심해지고 있는 듯합니다. 신념은 공존하기 어렵고, 혁명(상대의 신념을 바꾸는 것)의 시도는 서로에게 상흔만 남긴다면 우리는 각자의 신념을 감춘 채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기년 전 우연한 기회로 서로 다른 정치 편향을 가진 사람들의 대화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법 열린 마음으로 만나기로 했으니 격론이 오가지는 않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긴장이 되는 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배려가 깃든 조심스러운 대화가 이어지자 해묵은 오해를 푸는 오래된 친구들처럼 그들의 낯빛이 밝아지는 것 아니겠어요?
대립이 아닌 대화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가 손해를 감수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내가 몰랐다’, ‘내가 믿는 것이 정답이 아니다’, ‘당신의 경험과 과정을 들어 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인정하기 시작하니 진짜 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손해로 시작해 서로가 서로 곁에 ‘남는 장사’를 한 셈이지요.
지켜보던 저도 덩달아 마음이 찡했습니다. 신념이 달라도 공존할 수 있겠다는, 아주 희미하고 어렴풋한 희망도 품게 되었고요.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잘 살기를 바랄 뿐이지요. 신념도 정치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겐 눈앞의 서로가 더 중요하고요. 그런데 그걸 자꾸 잊습니다. 잊지 않으리라 다짐해도 반갑지 않은 연휴 끝의 월요일처럼 망각은 불쑥 다가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 역시 나와 다른 상대의 신념을 바꾸려 하지 않고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글로 남겨두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기록은 다만 써두는 것만으로도 그 생각과 마음이 지속되곤 하니까요. 이 또한 생존을 위한 분투일 수 있겠습니다. 언어가 오염되지 않도록 애쓰는 것처럼 신념을 기억하기 위해, 내가 나로 살아가기 위해 수없이 많은 나와 대립하는 분투. 오늘은 이 분투를 나로 향하는 혁명이라고 불러봅니다.
분량 조절 실패했네
다음 편지는 어쩌지
싶어, 난감해진 이 새벽,
이학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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