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독립출판시집 『주머니시』에 발표한 저의 시 「청춘」(2020) 전문입니다. 기년 전 세상에 내놓은 시를 새삼 편지로 가져온 이유는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답서에 이 시가 담겨 있었기 때문인데요. 오늘은 이 시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시를 발표한 경위부터 말씀드려야겠지요. 계속 쓰고 있었습니다. 어린 날부터 시 같은 문장을 부리는 게 습관이자 취미였습니다. 시라고 불러도 될지 고민한 건 다음의 일이었고요. 혼자 쓰고 가끔 꺼내 읽다가 독립출판을 하면서 처음으로 시를 공개했어요. (그때도 ‘시’라고 하지 않고 ‘시와 비슷한 것’이라고 표현했네요)
이후에도 종종 썼지만 특별한 계획은 없었습니다. 다음에도 독립출판을 하거나 온라인에 올리겠다는 가벼운 각오만 있을 뿐. 아직 여문 게 없어서 발표를 미룬 것도 사실이었고요. 그러다 『주머니시』라는 독립출판시집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머니시』는 투고로 만들어지는 시집이에요. 대중성과 문학성을 고려해 수록작을 선정합니다. 문학성은 문학 공모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준이니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하지는 못해도 놀라지는 않았는데요. 대중성을 가늠한다는 내용에는 놀랐습니다. 시를 지으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기준이었거든요.
다른 형식의 글을 쓸 때는 읽는 사람들을 의식합니다. 많이 읽힐 만한, 주목받을 만한 글을 쓰려고 노력한 건 아니에요. 적어도 읽는 이가 재미나 정서적인 무언가를 겪을 수 있기를 바라거나 사유나 토론의 시작이 될 만한 미세한 단초라도 남겨두려고 글을 씁니다.
읽고 쓰는 일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매번 글마다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적 연결을 시도하는 것이고요. 다만 시는 그렇게 쓰지 않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읽는 이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야 한다기보다는 그래도 된다는 믿음으로. 시작(詩作)의 태도가 그러하니 ‘대중성’이라는 세 글자가 유독 커 보인 거겠지요.
기획 의도를 모르지 않아서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대중성을 고려해 시를 쓰자니 막막하더군요. 대중적인 시가 무엇일까. 곰곰 생각하고 찾아보아도 답을 찾기가 어려웠어요. 결국 책이 된 시와 시로 엮은 책이 있다. 그 정도만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전자는 먼저 온라인을 통해 관심과 공감을 받은 경우이며, 후자는 문단을 통해 인정받은 경우인 듯했습니다. 세상에는 그러한 분류로 나눌 수 없는 시가 더 많겠지만, 투고를 준비하던 당시의 저는 이렇게 급히, 부박한 결론에 도달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제가 전자에 해당하는 시를 소비하는 독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건 관심과 공감을 받는 시를 흉내 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이야기였고요. 마냥 직관적으로 써 보기로 했습니다. 분량 또한 제한적이니 핵심적인 목소리만 담아보려고 했고요. 그렇게 다양한 버전(?)을 만든 뒤 하나를 선택해 투고했습니다.
운 좋게도 잡아주신 손 덕분에 「청춘」은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 후엔 누가 어떻게 읽을지 크게 마음 쓰지 않았습니다. 창작으로든 노동으로든 시만 쓰고 산다면 달랐을까요? 그러지 않아서 그런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예쁜 사각형에 새겨진 저의 시를 만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요.
하나 발표한 지 수 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반가운 시의 연락을 받습니다. 네 번째 편지 ‘그저 살아보려는 마음’에도 말씀드린 적 있지요. 『주머니시』의 송유수 대표님께서 소식을 전해주셔요.
이 편지를 준비하며 저도 찾아보았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시가 읽힌 흔적을 말하는 것이어서 자랑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만 참아주세요. (죄송해요, 금방 끝나요!)
트위터와 블로그에 공유된 게 제일 많더군요. 필사도 여럿 발견했습니다. 유튜브를 찾아보니 기계음으로 낭송하는 영상도 있더라고요. 전에 말씀드렸듯 네이버 지식인에도 질문이 몇 번 올라왔습니다. 이 시가 무엇이냐고, 책으로 나온 적 있느냐고요.
메시지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 한 학생분께서 시에 관한 과제를 하려고 「청춘」을 선택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정보가 부족하다고 제게 창작 의도와 메시지 등을 알려달라고 하셨어요.
성심껏 답했습니다. 창작자가 해석을 덧붙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도 과제는 내야 하잖아요. 더구나 메일이 아니라 메시지라서 어서 답변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 설명하고 말았지요.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이유는, 그러니까 창작 의도라는 걸 말해볼 수는 있겠지만 '그게 정말 진실일까?' 싶어서 그렇습니다. 의도가 있을까요? 그렇게 써지니까 쓴 건데. 이렇게 재미없게 말하지 않은 건 다행인 듯하네요.
시의 흔적 말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잘 참아줘서 고마워요!) 뻔뻔하게 흔적을 톺아봤지만, 사연(?) 많은 이 시를 제가 평가할 수는 없겠습니다. 스스로 좋다고 하면 비소를 받게 될 테고, 엉망이라고 말하면 시를 애정하는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테니까요.
판단하지 못하니 서툴러집니다. 남겨주신 흔적 앞에서 혼잣말하지요. 정말 좋은가? 뭐가 좋은가? 그러다 문득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시의 반응에 준비되지 않은 상태구나. 다르게 생각해 보면 「청춘」의 주인은 제가 아닌 것도 같습니다. 다만 가장 먼저 꺼내 놓은 사람일 뿐. 이렇게 거리감을 두니 제가 해야 할 일은 조금 알겠더군요.
정세랑 작가님의 소설집 《아라의 소설》(안온북스, 2022)에 담긴 〈10시, 커피와 우리의 기억〉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카페를 하는 ‘가을 씨’가 ‘나’에게 실험실에서 재배된 커피의 샘플을 평가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나’는 말합니다. “과찬하자. 아주 아주 조금만 과찬해버리자.” 그 뒤에 나온 문장. “내가 말했다. 과찬해서, 이 매력이 애매한 원두에게 기회를 주자. 더 나아질 기회를.”
어쩌면 제가 세상에 부리는 모든 것들을 이렇게 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주 아주 조금만’을 잊지 말고, 과찬해야겠습니다. 더 나아질 수 있도록.
소설의 맥락과는 조금 다르지만, 저마다의 청춘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도 이랬으면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에게 혹은 자신에게 기회를 줄 수 있을 테니까요. 청춘은, 그러라고 있는 것일지도요.
며칠 전 생일이었습니다. 생일마다 잊고 살던 나이를 세어봅니다. 매번 놀랍니다.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은 거지? 그래도 아직 어리다고 생각합니다. 어디에 가나 ‘아저씨’ 소리는 듣지만 ‘어르신’ 소리는 듣지 않으니까요. 이렇게 ‘아’ 다르고 ‘어’ 다르니 저도 아직은 청춘인 듯합니다.
익숙한 이야기겠지만, 청춘이란 시기가 아니라 태도이겠지요. 바깥이 어떻든 봄이라 여기면 어느 계절이든 안온한 것처럼. (물론 봄의 마음이면 봄 날씨처럼 변덕을 부리게도 될 것입니다) 당분간 저는 청춘의 태도로 살아보려고 합니다. 여전히 삶에는 소질이 부족하지만, 봄처럼 웃어보렵니다.
‘지금이 그럴 때야?’ 묻는다면 ‘청춘이라 그래.’ 무구하게 핑계 대며 봄이나 맞아 보려고요. 혼자가 아니라서, 이 편지를 깊고 너른 품으로 읽어 줄 선생님이 계셔서 제게도 그럴 기회가 있다는 것. 그게 되게 좋습니다.
선생님이 건넨 시라면
아무래도 좋은 이 새벽,
이학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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