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고 살았어?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묻습니다.
그냥, 그냥 살았지.
보통 이런 대답을 듣게 되는데요. 때마다 안도합니다. 그냥 사는 게 얼마나 기특한 일인가요!
질문의 대상이 나일 때도 있습니다.
뭐 하고 살았어?
내 일만 벗어나면 백지가 되는 이력서를 볼 때. 네, 지금 제가 묻습니다. 나름 치열하게 내 일하며 살아온 것 같은데 나의 세월은 왜 흰 벽 위에 세워둔 사다리처럼 보이는가. 왜 빈칸인가. 이름을 가리고 다시 보니 참 미스터리한 청년이네요. 도대체 십 년 넘게 뭐 하고 살았어? (산속에 있었나?)
그러다가 ‘청년 도전 지원 사업’이라는 프로그램에 지원했습니다. 취업 공백기를 겪는 청년을 지원하는 고용노동부 주관 청년 취업 지원 정책이라는데 사실 잘 모르고 신청했습니다.
신청 후 바로 연락이 오더군요. 담당 선생님께서 해당 프로그램에 대해서 소상히 알려주셨어요. 정확하고 명료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네, 송구하게도 저는 들어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도 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내일은 사전 인터뷰에 갑니다. 면접은 아니고, 제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결정하는 단계라고 하더군요. 이제 와 거창하게 도전 같은 걸 해볼 엄두는 안 나지만 일단 가보려고 합니다.
잘한 거겠지요?
새로 달을 새는 달이 온 뒤 저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시 무언가를 희망한다는 게 편하지 않아서 연초마다 남의 일인 양 무심한 척했었는데요.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이번엔 매달 마감할 일과 도전할 목표를 정해놓고 말았습니다. 러프하게 세운 계획이건만 할 일이 제법 많더군요. 이걸 언제 다 하지, 싶다가도 어떻게든 하겠지, 합니다. 이것도 바람이라면 바람이겠지요.
선생님, 바람이 찹니다. 제 걱정은 마시고 단잠 이루시길. 아, 어려우신가요. 실은 저도 그래요. 오랜 불면증? 그건 괜찮아요. 신경 쓸 일이 많은 것? 익숙한걸요. 다만 자다가도 뒤척이며 뉴스를 확인하느라 바빠요.
어쩌다가 세상이 이렇게 된 걸까요?
작업실에 TV가 없는 저는 인터넷으로 세상 이야기를 보고 듣습니다. 그러나 찾아보는 것과 틀어 놓는 것은 다를 테지요. 요즘엔 세상을 등지고 작업하다 가까운 사람에게 전화가 오면 뉴스를 확인하듯 대뜸 묻습니다.
잡혀갔어?
다음 편지를 보낼 때는 잡혀간 다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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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쓰고서
편지지에 옮겨 적지 못한 채 한 주가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일단 잡혀간 것 같은데요. 저도 잡혀버렸습니다. 목감기였어요.
사흘간 열이 떨어지지 않아서 고생하다가 나흘 차부턴 목이 너무 아파서 말도 못 하고 진종일 누워있었어요. 이런 파워 감기(!)는 한 십오 년 만에 다시 겪어보네요.
완전히 회복한 건 아니지만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습니다. 시작한 일은 해야 하니까요. 어제 처음으로 ‘청년 도전’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왔습니다. 어, 그러니까, 달라진 건 당연히(!) 없고요. 계속해보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차차 털어놓을게요.
새해와 소망은 한 단어처럼 자주 붙곤 합니다. 친구나 연인 같기도 합니다. 저는 둘 사이를 지켜보는 취미가 없어서 나란히 둔 적 없었는데요. 이번엔 한 번 이어보았습니다.
소망을 적는데요. 쓴다고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변할 것도 없는데 무슨 마법의 주문서라도 작성하는 것처럼 진지해지더군요.(ㅋㅋㅋ) 다른 때 같았으면 ‘건강’이나 ‘무사’ 같은 단어 한두 개 적고 지나쳤을 테지만 이번엔 곰곰 생각하다 한 줄 적어보았습니다.
부끄러우니까 공개는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선생님, 우리 또 만나요. 그냥, 그냥.
파워 감기와
사투 중인 이 새벽,
이학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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