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일을 시작한 친구에게서 늦은 밤 종종 전화가 옵니다. 제법 긴 시간 떠들지만 그래봐야 특별한 얘기를 하는 건 아닙니다. 주로 일이나 다음 약속 같은 평범한 주제로 떠들 뿐이지요. 현실에 관한 수다라는 게 으레 그렇듯 한탄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요컨대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으로 시작하는, 우리에게 오지 않은 시간을 그려보며 아쉬워하는 것이지요.
친구는 자주 한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가능성을, 다른 경로를 상상하는 일을요. 그러면서 자신과 다른 선택을 했을 다른 차원의 자신은 지금의 자신보다 행복하게 지낼 거라고 짐작하더군요. 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통화로는 보이지 않을 테니 단호하게 소리 내 덧붙였어요.
멀티버스는 모르겠고. 나는 그런 가정 하지 않아.
왜?
너무 슬퍼지니까.
오래된 인연 앞에서는 슬픔을 발음해도 웃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놓친 일들을 늘어놓으며 함께 작아지고 망가지고 보잘것없어질 때까지 한동안 웃고 떠들다 전화를 끊었습니다. 친구는 오늘 밤에도 일하고 있겠군요. 전화 걸어 볼까 하다가 선생님께 보낼 편지를 씁니다. 이 작은 선택도 내일로 가는 물줄기를 바꾸는 일일까요? 알 수 없습니다. 내키는 대로 쓸 뿐입니다. 어쩌면 저는 늘 이래왔는지도요.
선생님께 편지를 보내기 전에는 언제나 예전 편지들을 다시 읽어 봅니다. 지난 몇 달간 일 얘기만 했더군요. 아차 싶어서 반성했습니다. 그러다 되물어 보았습니다. 살아보겠다고 하는 일인데 일해서 살아남은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아차 또 일 얘기를 해버리고 말았네요. 얼른 인사드리며 주제를 바꿔 봅니다. 잘 지내셨지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잘 지냈습니다. 별 탈 없었으니 그리 말하는 게 온당할 것입니다.
반면 우리 세상은 잘 지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가 직면한 어지럽고 답답한 국면을 참고 보다가 세계로 눈을 돌려 보면 한숨이 짙어집니다. 모든 게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환경과 지구까지 범위를 넓히면 아득해지고 맙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게 부끄러워서, 눈 감는 날까지 정답 모를 질문을 또 던지게 되지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 수상한 시절을 보낼 때마다 ‘나는 이 세대를 선택한 적 없는데’ 중얼거립니다. 그러다 겪어 본 적 없는 이전 시대(또는 세대)를 얕보는 일처럼 느껴질 즈음 멈추곤 하는데요. 어느 쪽이 더 힘겨운지 가늠하지는 않습니다. 슬퍼지니까요.
언제 태어났건 힘들기만 한가, 인생은 역시 고통뿐인가. 이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견 동의하지만 슬픔에 매몰되지는 말자고요. 힘들다, 어렵다, 아프다 그런 말을 버릇처럼 내뱉다가도 글을 쓰고, 신보를 듣고, 영화를 볼 때면 고통만 반복되지는 않다는 걸 문득 깨닫기도 하니까요. 무엇보다 이 시절을, 이 시절조차 선생님과 함께 통과하고 있음에 든든해집니다. 살아볼 만해집니다.
3월도 저물어가는군요. 봄이 버썩 앞질러 가는데 계절을 따라가기 벅찬 기분이 들어요. 무기력이 다시 고개를 들어서 그런가 봅니다. 한 번 마음에 익숙해진 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가 봐요. 무기력이란 게 그렇습니다. 도무지 할 일이 없을 때만 찾아오지 않아요. 많을 때도 옵니다. 마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일처럼.
도통 눈치 없는 무기력 앞에서 권태로운 기분을 느낄 때마다 천수호 시인의 「권태」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시인은 시에서 권태를, ‘일어서지도 걷지도 않고 웅크린 채’ 마음 안에 사는 ‘곰 한 마리’로 표현하지요. 곰은 총구를 겨누어도 ‘총을 모르’기 때문에 ‘울지도 놀라지도 않’습니다. 오래된 가난처럼 무구하게, 무력하게 곁을 지키며 마음의 주인과 한 몸 되어 사는 것입니다.
마음만 바쁘고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저는 잠으로 도망치곤 합니다. 불면증이 있지만, 퍽 무기력할 때는 잠에 푹 빠져들기도 하거든요. 어느 이른 저녁에 자고 있었는데요. 연달아 메시지가 오더군요. 오래 알아 온 사람들이 각기 전해준 다른 소식은, 누구나 아는 한 사람의 부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답장을 미루었습니다. 여기서도 여백으로 남겨두려 합니다. 대신 슬픔에 대처하는 선택에 관해서 말해 봅니다. 아마 저는 슬픔을 작게 나누고 가르고 잘라서 일상 내내 겪는 쪽을 선택하는 듯합니다. 폭우처럼 쏟아질 비애를 맞고 서 있을 자신이 없으므로 소낙비가 내리는 우기를 살기로 한 것처럼.
단지 ‘미루기’일 뿐이겠지요. 건강한 방법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이러한 수법으로 저는 살아낸 듯합니다. 몇 해간 입에 담지 않은 이름이 있고, 해마다 겨울이면 꺼내 보던 드라마를 잊고 살지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계속 그럴 것 같다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가정해 봅니다. 그러면 예정된 슬픔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아지더군요. 지금이, 오늘이 근거가 되는가 봅니다.
너무 무거운 얘기였을까요?
말씀드렸듯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보내 주신 ‘POWER’로 힘내고 있고요. 어제는 새 프로젝트 면접에도 참여했습니다. 올해는 가야 할 곳도, 해야 할 것도 많으니 계속 잘 지내고 싶습니다. 더구나 봄이잖아요. 듬성듬성 무기력해지고 슬퍼지더라도 그보다 자주 웃어보려 합니다. 우리는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오은 선생님께서 보내 주신 답서에 담긴 말을 선생님께 전하며 인사드립니다. 무탈하게 다시 만나요. 안녕.
‘봄이 왔습니다. 조심조심 다가오다가 성큼 왔습니다. 틈틈이 봄날 만끽하시면 좋겠습니다.’
먼 곳의 당신은
내내 봄에 머물기를
바라는 이 새벽,
이학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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