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셨나요, 선생님. 격조한 시간이 길었습니다, 라고 쓰고 보니 첫 편지네요. 처음이 아닌 기분이 드는 건 기분 탓이겠지요.
여하간 궁금합니다. 잘 지내고 계시는지. 저는 그러려고 노력 중입니다. 술은 괴로워서 거의 마시지 않고, 밥은 귀찮아도 거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혼자 살며 글을 쓰고요.
요즘은 책·영화·시리즈에 기댄 원고를 자주 씁니다. 한 매체에 싣고 있는데요. 그래서 여러 작품을 찾아보는 게 일상이기도 합니다. 벌써 한 해 동안 해온 일이네요. 그 외에도 투고 기획서나 원고를 다듬고, 생활에 필요한 글을 쓰기도 합니다. 시와 소설은 쓰기보다 미루기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고요.
지금도 할 일이 많지만 미룹니다. 입으론 바쁘다면서 손으론 스멀스멀 편지를 씁니다. 아무래도 저는 선생님께 할 말이 많았나 봅니다.
하나의 작품을 쓸 때는 그것만 생각합니다. 요컨대 ‘고독’에 대해 쓴다면,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볼 때도 머리 한쪽에 ‘고독’을 입력해 두고, 생활 안에서 그것에 해당하는 것을 만나면 글과 연결 짓는 것이지요. 고정된 주파수를 열어두는 것처럼요.
편지를 쓸 때도 그렇습니다. 보내기 전까지 계속 수신인을 떠올립니다. 이 편지를 쓰면서도 그랬습니다. 마트에서 간식을 보다가 선생님을 떠올렸고요. 책을 읽으면서도 편지에 담으려고 단어 하나를 포획했습니다. 한동안 제 생활 안에 둘 사람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수신인을 떠올리며 사는 게 처음은 아닙니다. 기년 전, 뉴스레터나 메일링서비스라고 불리는 이것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달 내내 발행한 적 있었고, 코딩까지 활용해 발행폼을 만들기도 했고요. (그런데 저는 지금도 코딩이 뭔지 모릅니다) 좋은 기억이 많고 후회는 없지만 하는 동안 힘에 부쳤던 건 사실입니다. 잘하고 싶어서 무리했는데, 그때는 스스로 괴롭혀야 만족하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때가 있더군요. 내 잘못이 아님을,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게 아님을 증명하고 싶어서 빈손으로 온몸을 혹사하는 때. 그때 저는 쓸데없는 일에 힘을 다 쓰고, 정작 글은 제대로 쓰지 못해 마음이 엉망이었습니다. 이번엔 그러지 않으려고요.
편지를 쓰겠다고 결정한 건 최근의 충동이었지만, 다짐은 작년에 했습니다. 잘해야지, 하다가 시작을 미루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제대로’ 같은 마음을 먹으면 영영 시작하지 못할 것 같아 최대한 편하게 시작해 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스스로 규칙을 정하면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곤 하는데요. 그래서 규칙을 최소화하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마음먹기라는 큰 산을 넘었더니 잠긴 문이 눈앞에 서 있었습니다. 열쇠는 이름. 이름을 짓지 못하면 시작할 수 없었습니다. 힘을 빼고 쉽게, 규칙 없이 오래 할 일의 이름을 정하려니 또 힘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태에 빠지니 조금은 고독해져 버렸고요. 해서 평소처럼 고독에게 혼잣말하다가 이 뉴스레터의 이름을 정했다는 재미 없는 이야기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뉴스레터 소개 문장에 적혀 있지요)
재미있는 사실은 이 편지를 한 달에 세 번 이상 보내려면 돈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메일 발송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저는 이 점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더하려면,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면 돈을 내야 마땅한 듯해서요. 반면 듣는 일은 돈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드리지 못해 미안할 따름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선생님, 성심껏 편지를 쓸게요. (작가는 그렇게 사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항상 미안해하며 그 힘으로 조금이라도 더 나은 글을 쓰려는)
선생님은 편지를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는지요. 저는 작별이 떠오릅니다. 작별의 순간마다 편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부는 아니어도 많은 작별 앞에서 그랬습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던 때도, 대학교 실습이 끝나던 날에도 저는 함께한 분들께 편지를 드렸습니다. 글 쓰는 사람이 된 뒤로도 그랬습니다. 연재 끝마다 매번 편지 같은 글을 공개했습니다. 첫 독립출판도서의 5주년이 되던 날에도 작별의 편지를 썼고요. 절판 소식을 전하며 손을 흔들 듯 문장을 끝마치던 기억이 납니다.
작별의 순간엔 왜 편지였을까요. 그때까지 전하지 못한 마음을, 그 후로는 전할 수 없으니 서둘러 적어 보낸 것일까요. 아니면 진심을 전한 후 도망치기 좋은 순간이어서일까요.
작별에 자주 쓰던 편지를 이번엔 시작하며 꺼내었습니다. 시작뿐만 아니라 내내 편지로 인사드릴 생각을 하니, 마음 쓸 곳을 찾은 것 같아서 잠시 감격합니다. 무엇보다 이 편지를 불특정 다수에게 보내지 않는다는 게 저는 무척 마음에 듭니다. 편애하는 이름에게 마음을 보낼 수 있다는 것. 특권으로 여깁니다.
이렇게 쓰니 편지 애호가쯤 돼 보이기도 합니다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릴 적에는 편지를 쓰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자주 도망치곤 했습니다. 진심을 들키기 싫었던 것도 같습니다. 지금도 현실에서는 편지가 두렵습니다. 진심은 너무 자주 변하고, 관계 앞에 확정된 언어를 둔다는 게 꺼림칙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쓰는 사람’으로서는 예외입니다. 산문이나 잡문을 쓸 때도 마음을 다해 전할 것이 생기면 편지(서간체 형식)를 종종 활용합니다. 그런 순간에 편지는, 내밀한 이야기를 꺼낼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겠습니다. ‘고독에게’는 제가 처음 꺼내는 마음들을 담는 용기가 될 것입니다.
편지를 쓸 때는 혼자이지만, 혼자일 수만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누군가를 떠올리며 쓰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저에겐 선생님이어서 다행입니다. 수신함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속 혼자일 수 있게, 그러나 한 번도 혼자인 적 없게 쓰겠습니다.
우리의 내일은 조금도 예상할 수 없지만, 우리가 편지로 만나는 순간은 평온을 예상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려면 쓰는 손도 읽는 눈도 편해야 할 것입니다. 서로 마음 다치는 일 없었으면 합니다. 그게 잘되지 않을 땐 언제든 말씀해 주시고요.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건강하시고요,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날까지 평온하시길.
날이 너무 좋아
조금은 서글픈
그런 봄날, 이 새벽
이학민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