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집에 갈 일이 있어서 길을 나섰습니다. 집은 멀지 않습니다. 십오 분 정도만 걸으면 되니까요.
제가 사는 셋방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는 버스 정류장이 두어 개 있습니다. 아침에 그곳을 지나면 교복 입은 학생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도 그랬습니다. 여전히 마스크를 쓴 학생들이 많더군요. 그들을 보는데 얼마 전 본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매체를 통해 독후 잡문(저는 그 글들을 당분간 이렇게 부르려고 합니다)을 쓴 영화이기도 한데요. 영화를 보는 동안 얼마간 죄책감을 느꼈고, 그래서 쓸 수밖에 없던 것 같습니다. 그런다고 죄책감이 덜어지거나 제 삶에 변화가 생길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에게 들어온 이야기나 아프게 지나간 것들이 아무 의미도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매번 사소하게나마 저를 사유하게 만들고, 소극적으로나마 행동(글쓰기)하게 하니까요.
따지고 보면 시간은 허투루 갑니다. 의도도 의미도 없이 흐르지요. 주워 담을 수 없고 막지도 못하고요. 다만 그 세월에 무얼 채워 넣을지는 제가 선택할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연과 불가항력의 일을 뺀 나머지 반 정도는요. 그러니까 저의 반은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마음에 닿는 이야기로 저의 세월을 채우며. 그로 인해 문득 변해가며.
변화의 끝이 어딘지 이 방향이 맞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안도하는 이유는 그것을 아는 체 살아가는 사람이 많지 않으리라는 짐작 때문이지요.
이렇게 살다 보니 봄이네요, 선생님. 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벌써 4월이 지나갑니다.
이번 달은 어떠셨는지요. 디저트는 놓침 없이 드셨는지, 해는 자주 보셨는지 궁금한 게 많습니다. 저는 잘 먹고 잘 걸으며 지냈습니다. 시간보다 손이 느려서 고생한 것만 빼면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이번 달에도 저의 주요 관심사는 마감이었습니다. 다행히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쓰는 사람으로 살아오면서 종종 귀한 지면을 빌리곤 했는데요. 마감을 어긴 적은 없습니다. (약속은 지키는 게 당연하고, 지면이 많지 않았으며, 마감을 어기더라도 더 좋은 결과물을 기대하는 담당자분들도 있다고 들어서 이것이 자랑은 아니겠습니다)
뭐든 느린 제가 마감을 어기지 않은 비결은 성실함이 아니라 분수를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쓴 원고의 완성도가 현재도 충분하지 않은데 가까운 미래에도 그럴 리 없다는 확신이 들 때 저는 마침표를 찍습니다. 서툰 글에 스스로 당황하다가도 마감 시간이 가까워지면 서두르는 것이지요.
괜찮은 글을 보내지 못하면 다가올 오해와 실망이 무섭지만, 함께 일하는 분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만큼 두렵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십 대 중반까지만 해도 몰랐는데요. 여러 일을 겪고서 이렇게 변한 것 같습니다.
물론 정답은 아닐 것입니다. 프리랜서마다 일하는 방식이나 가치관이 다를 테니까요. 다만 저는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독후 잡문도 이러한 태도로 1년간 마감해 왔습니다. 새어보니 원고의 개수가 단행본만큼 쌓여 있더군요. 고백하자면 독후 산문을 투고하려고 합니다. 어디(출판사)에 할지는 정하지 못했고요. 어떻게(기획과 원고) 할지만 정했습니다.
처음부터 계획한 일은 아닙니다. (이 계획의 탄생과 변화는 다음 기회에 말할게요) 지금 제 곁에 머무는 계획은 따로 있습니다.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시인이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 모두 한참 미뤄온 것들인데, 이미 반쯤 누리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남해나 속초로 떠나고 싶습니다. 휴식이나 관광이 아니라 시를 쓰는 여정이길 바라는데요. 그곳에 가면 저는 시인이 될 수 있을까요? 확인할 수 없으니 떠나야 하겠습니다. 아직 출발하지 못했는데 그곳의 밤과 바다와 흰 노트북의 화면을 떠올리니 상상만으로도 고독해집니다.
이 고독이 시 쓰기에 필요한 것이라면 저는 당분간 여행을 상상하며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허투루 가는 시간 안에,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반 정도 되는 세월에, 언제든 떠나려는 마음을 채워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여름이 오기 전에 가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다들 이렇게 ‘내가 바라는 시간’을 기다리며, 그 기다림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일지도요.
마감 후 이런 생각을 하다가 저는 텅, 비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닥까지 바득바득 긁어 써버린 탓인 것 같습니다. 채워야 또 쓸 수 있을 텐데 참지 못하고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해온 일을 잠시 잊고, 다음 할 일을 흐린 눈으로 보면서 선생님 앞에 앉고 만 것입니다. 물론 제 앞에 선생님은 계시지 않지요. 그러나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게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 무언가 변하더라도 여기 있어 주세요. 건강만 지켜주세요. 오늘은 더 바라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안온하길 바라는
이 새벽
이학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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