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글을 읽는데 초여름 비 냄새를 맡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기분은 제가 가진 표현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소란 없이 슬프고, 시원하면서도 따듯한. 그 상태를 뭐라고 해야 할는지. 고민하다 인사가 늦어지고 말았네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세 번째 편지로 인사드려요. 오늘은 예고해 드린 대로 제가 편애하는 한 작가님에 관해 말씀드리려고 해요.
시작에서 말한 ‘그 글’은 제가 처음으로 읽은 작가님의 글을 의미합니다. 수년 전 일이므로 정확한 기억은 아닙니다. 온라인에서 그 글을 읽은 후 작가님의 책을 읽은 건지, 그 반대인지 순서조차 헷갈립니다. 아무려나 글의 배경은 어느 기차역이었고, 글쓴이 이름에는 ‘달님’이 쓰여 있었습니다.
새로운 에세이(산문)는 없다고, 오만하게 자신하던 저는 김달님 작가님의 글을 읽고서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슬퍼서 좋고 담담해서 슬픈 그분의 글은 다른 세계의 글 같았기 때문입니다. 좋은 글을 보면 문체나 형식을 학습하곤 하는데요. (그렇지만 저는 A.I가 아니에요!) 작가님의 글 앞에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따라 할 엄두가 나지 않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 글들은 저를 오롯이 독자이게 만들더군요. 더 궁금해졌습니다. 더 멀리,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렇게 저는 작가님의 독자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조금 흐른 지금 저는 MCU(Marvel Cinematic Universe)만큼이나 DEU(Dalnim Essay Universe, 네. 지금 제가 만든 용어입니다)를 자주 방문합니다. 이 다정하고 흥미로운 에세이 세계관의 중심은 세 권의 산문집입니다. 그러니 독자로서의 여정을 말하려면 이 책들을 겪은 순간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첫 산문집은 《나의 두 사람》(어떤책, 2018)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다정한 마음도 있어.” 그것을 제게 들려준 책입니다. 아름다운 다큐멘터리 또는 동화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읽는 동안 어떤 새로운 세계에 처음 입장한 기분도 들었고요. 그곳에서 저는 책의 제목과 달리 세 사람을 만났습니다. 덕분에 세상을 조금 더 긍정하게 된 기억도 납니다. 그렇게 기억해 두고 싶은 창작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산문집은 《작별 인사는 아직이에요》(어떤책, 2019)이지요. 이 책은 오랫동안 열지 못했습니다. 열고서도 넘기는 데 한참 걸렸습니다. 아마도 세계관에 깊이 몰입한 까닭인 듯합니다. 그렇게 엄살을 부리다가 용기 내 읽어나갔습니다.
제목은 아직 버거웠으나(저에게는 ‘아직’이 ‘작별’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읽고 나니 제가 알던 작가님의 책이 맞더군요. 슬프고 포근한 비 냄새가 났습니다. 여전히, 그 기분을 표현할 능력은 제게 없지만요.
책을 덮고서 생각했습니다. 다음 작품이 궁금하고 기다려진다고요. 기대감과 여운 때문이기도 했고요. 걱정과 안도가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요.
이윽고 만난 세 번째 책은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수오서재, 2022)입니다. 이 책은 제가 한 해의 책·영화·시리즈 10선 중 하나로 꼽을 만큼 자주 누린 책입니다. 글로 쓴 적도 있고요. 해서 오늘은 한 번도 하지 않은 책 밖의 이야기만 남길게요.
저는 이 책의 ‘함께 읽기’ 프로모션에 참여했는데요. 마케터 분께서 재치 있는 선물―책에 나온 과자를 보내주셔서 감동한 기억이 납니다. (약간 국내 최초 4D 에세이 느낌이었습니다)
또 출판사에서 배포한 스마트폰 배경 화면이 있습니다. 함주해 작가님이 그린, 표지에 담긴 그림인데요. 봄을 닮은 그것이 마음에 들어서 제 배경 화면에 두고 있습니다. 한 해가 지났고, 그사이 저는 스마트폰을 바꿨지만 배경 화면은 그대로입니다. 덕분에 사시사철 작은 봄을 손에 쥐고 살아가고 있어요.
이처럼 몇 번의 계절 동안 제집처럼 작가님의 산문집을 오갔는데요.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엔 조금 달리 보이더군요. 일테면 첫 산문집에서 세 번째 산문집까지. 그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관점이 미묘하게 달라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일인칭으로 전개되던 글이 삼인칭으로 변한 것처럼요. 커다란 앵글로 보게 된 이 세계관은 조금 더 깊고 투명해 보였습니다.
그 투명을 바라보며 저는 자주 웃고 울고 맙니다. 읽는데, 그저 책 밖에서 읽을 뿐인데 이해받는 기분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제가 읽고 쓰는 사람이 되는 데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아니, 태어나게 해주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제가 책과 영화를 보고 떠드는 말들을 귀담아들어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때로 소감을 묻거나 질문하려고 늦은 밤 전화를 걸어오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그러하시듯 저에게도 무언가를 평가하는 눈과 입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없습니다.
저는 평가를 즐기지 못합니다. 책을 읽고 소셜미디어에 감상을 남겼다가 몇 시간 만에 지운 적도 있습니다. 내가 뭐라고, 그런 마음도 있었고요. 저의 평가가 그 자체로 오류이거나, 작품을 만든 이와 그것을 향유할 이들에게 잘못된 영향이나 상처를 줄까 봐 두려워합니다. 이 또한 스스로 너무 크게 생각한 탓이겠습니다. 여기서도 말할 수 있지요. 내가 뭐라고. 알면서도 계속 물러섰습니다.
매체를 통해 책 기사를 내기 시작할 때도 그랬습니다. 그저 누 끼치지 않을 정도만 쓰자. 진심이지 말자. 시간을 두고 읽을 글이 아님을 잊지 말자. 그런 다짐이 있었습니다. 김달님 작가님의 세 번째 산문집을 읽고 쓰기 전까지는요. 그 책을 읽고 쓰려는데 저도 모르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제대로 쓰지는 못했습니다. 할 말이 넘치니 정리가 되지 않더군요. 가까스로 마감한 후로 다시는 이렇게 몰입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작가님이 댓글을 남겨주셨습니다. 이해받은 것 같다고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평가하는 눈과 입. 그러지 않으려는 마음 사이에서 손만 아등바등하다가 비로소 제대로 해보고 싶어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가 관건입니다. 다시, 작가님께 배웠습니다. 작가님의 산문집을 톺아보다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판단한 DEU의 글은 이렇습니다.
함께할 때 그이의 얼굴과 등과 그림자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헤어지고 나서 혼자 그 사람을, 기억을, 의미를 헤아리다가 그이가 아닌 세상에 보내는 다감하고 정확한 사랑의 글.
이것이 저의 방향이 되었습니다. 책과 영화를 보며 이런 순서와 태도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욕심도 생겼습니다.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과 세상을 연결 짓는 협력자가 되고 싶어진 것입니다.
얼마 전엔 한 시인님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제 글을 읽었는데, 귀한 편지처럼 느껴지셨다며 마음을 전해주셨습니다. 딱딱한 산문이 어째서 편지로 읽힌 것일까요.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무언가 읽거나 보고서 쓴 글이 선생님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다면 그건 전부 김달님 작가님 덕분이겠습니다. (반대로 그 글로 인해 좋지 않은 시간을 겪으셨다면 순전히 제 탓입니다)
요즘 저는 목요일을 기다립니다. 김달님 작가님께서 매주 목요일, 시요일을 통해 《믿고 싶은 말들》이라는 이름의 새 산문을 선공개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아마도 올여름, 작가님의 신간이 나오나 봅니다. (아직은 구체적인 일정이 공개되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분께서 작가님을 ‘응시의 천재’라고 표현한 것을 본 적 있습니다. (정확히 누가, 언제, 어디에 남겨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전 연재분을 읽으며 저는 또 한 번 그 말에 공감하고 있답니다. 작가님이 응시한 세계관 속 인물들과의 만남이 기다려지기도 하고요. 전작에서 만난 분들도 모두 여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작가님이 기억하는 한 아무도 떠나지 않을, 그 세계관의 문을 조금 열어보니 이번에도 초여름 비 냄새가 나는 듯합니다. 해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여름에 이 책이 나오면 이번엔 더 오래, 더 깊이 마음에 비가 내릴 것 같다고요. 그러니 선생님께서도 작가님의 신간을 만나보신다면 이번에는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때까지 보내야 할 각자의 시간은 정확히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살면서
그런 시간을 통과할 때가 있다.
지금 이 순간을, 이 하루를,
깊이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깃드는 시간. (나의 두 사람)
구질구질하고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내겐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남고
나는 그것이 자주 기쁘고 슬퍼져서
이렇게 글을 쓴다. (작별 인사는 아직이에요)
나중에는 슬퍼질 좋은 순간이
우리에게 또 한 번 다녀가는 일을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
어쩐지 김달님 시인님의
시를 만나고 싶은 이 새벽,
이학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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