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은 늘 옳아요. 문을 열면 오래된 나무 향이 달려들고 시선 두는 곳마다 책이 있어서 아슴아슴 졸던 마음마저 달뜨고 마니까요.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이대로 길을 잃어도 좋겠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오늘치 ‘ㅎ’. 싶어지기도 하고요. 이 고양감! 서점을 자주 방문하시는 선생님께서도 아시는 감정일 테지요.
그제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망원동에 있는 ‘계절책방 낮과 밤’에 다녀왔습니다. 박정은 (그림작가) 선생님과 문진영 (소설가) 선생님이 함께 운영하시는 공간인데요. 제가 간 날은 문진영 선생님의 근무일이었습니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니 선생님이 정말 거기 계시더군요. 신기할 일 아닌데 신기해하며 책방을 두리번거렸습니다. 시원한 창에서 들어오는 빛. 안온하고 따뜻한 그림이 놓인 벽. 누군가 꼼꼼히 선별해 둔 책. 그리고 저만치서 도란도란 대화 나누는 책방지기님과 손님까지. 한눈에 봐도 여긴 평화야. 그런 생각이 들었고요. 이내 예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이 장소를 좋아하게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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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팅이 예정돼 있었습니다. 함께 단편 소설 한 편을 만들기로 한 선생님을 잠시 후 다른 곳에서 만나기로 했거든요. 처음 뵙는 것이고 취향은 물론, 아직 이름조차 알지 못하므로 평소 제가 아끼는 소설을 건네드리고 싶었습니다.
책을 전하며 말씀드렸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단편 중 하나가 수록된 책이라고. 아프고 슬프지만 어둡지만은 않다고, 배시시 웃게 될 만큼 재밌기도 하다면서.
‘낮과 밤’에서 그 책을 집어 들고, ‘꼭 그 책방에서 사야지’ 미뤄왔던 책을 더해 책방지기님께 내밀었습니다. 사인을 부탁드리고 이름을 말씀드렸더니 “선생님!” 하시며 저를 알아봐 주시는 것 아니겠어요.
앞에 있던 낯선 존재를 모르지는 않은 사람으로 인식하는 순간의 눈빛.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저는 선생님의 모습을 아는데, 선생님은 그렇지 않은 채 우리가 한 공간에 있는 것도 재밌습니다. 그 장면을 눈에 담고 싶으니 자주 유랑해야겠다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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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한 저자의 어느 한 시절 글 쓰는 자아를 여행하는 일이라고 해도 된다면. 우리가 한 권의 책을 읽고 충만해지는 순간은 좋아하는 여행지가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저기 가봤는데 좋았어. 주변에 추천할 정도는 되겠지요. 그러나 인연 깊은 장소라고 말하기엔 부족할 것입니다.
그 책을 여러 번, 그 저자의 책을 여러 종 읽은 후에야 저자가 그린 세계가 내게 익숙한 곳이 되지요. 그곳이 안온해지기까지는 반복과 세월이 필요할 테고요. 제게 문진영 선생님의 소설은 이제 안온한 장소입니다. 왕왕 말씀드렸지만 《딩》(현대문학, 2023)에 반했고, 그 후로 선생님 작품을 계속 읽어왔거든요.
인연 깊은 여행지를 만든 선생님이 앞에 계십니다. 어떤 말을 해야 좋을까요? 생각해 둔 말 많았는데 다 전하지는 못합니다. 서둘러 책방을 나오고 맙니다. 마음이 자꾸 바빠서.
아닌 게 아니라 그날따라 자주 달려야 했습니다. 대전과 서울(미팅 장소)만 오간 지난주엔 그러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기차 시간이나 약속 시간을 앞두고 매번 두 팔을 휘저으며 달음질했어요. 이상한 일입니다. 일정을 꽤 넉넉하게 잡아놨거든요.
종종 변수가 있긴 했어요. 요컨대 (네이버 지도를 보면) 5번 출구로 들어가면 된다는데, 가보니 공사로 인해 폐쇄돼 있고, 다른 출구로 들어가려면 길을 건너야 하는데 도통 신호가 바뀌지 않고. 그래서 발을 동동거리며 여기저기 뛰어다녔습니다. (서울은 버스 정류장도 알아보기 어려운 곳이 많더군요)
한편으론 서두르지 않아서 놓쳐 버린 일들이 떠올랐던 것도 같아요. 마음 놓고 있다가 놓치고, 놓치고서 울고, 허무해서 웃던 시절이 다가오면 바빠집니다. 할 일은 정해져 있어요. 살아오며 겪었고 앞으로도 다가올 무심한 희망이 사라지기 전에 다가가기. 울 시간 없으므로 울지 않고 달리기. 서둘러 쫓기.
물론 그날엔 울지 않았습니다. 대신 날이 더워 몸이 울더군요. 기차나 지하철에 앉아 땀을 닦으며 시간을 확인할 때마다 놀랐습니다. 늦을 줄 알았는데 한참 이른 시간이더라고요. 다행스러우면서도 그렇게까지 서두를 필요 있었나 싶더군요. 놓친 게 많은 사람은 어딜 가도 초행인가 봅니다. 낯설고 불안해서 서둘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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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이 많은 4월입니다. 처음 가는 길과 달리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는 낯설지도, 불안하지도 않습니다.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고, 웃고, 조금은 깊어지는 순간을 만드는 게 어렵지 않거든요. 그것을 자주 확인하는 시절이기도 한 것 같아요.
지난 2주간 목요일마다 상경한 이유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프로젝트 소개는 천천히, 다음에, 제대로 준비해서 전할게요) 협업할 분들을 만난 두 번 모두 환대받는 기분이 들더군요. 적극적인 발화와 경청, 배려와 다정함이 있었습니다. 전부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에요. 해서, 돌아오는 길에 자주 중얼거렸습니다.
이런 순간을 겪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해, 정말 그래야 해.
혼자서는 궁리만 하다가 때로 실망하고 자주 유예하던 일들을 타인과 함께하면 비로소 시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워가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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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번 달의 상경 일정이 끝났습니다. 돌아보면 꿈 같기도 해요. 종종 비몽사몽 했거든요. 피곤해서. (ㅋㅋㅋ) 여하간 다 좋았습니다. 자주 감격할 수 있었으니까.
다만 발에 느긋함에 주지 못한 건 아쉽습니다. 찾아뵙지 못한 분이 많은 것도 그렇고요. 서울에 갔다는 소식만으로 연락해 주신 분도, 시간과 거리가 맞지 않아 닿지 못한 분도 계셔서 미안합니다.
그러니 기약하려고요. 네, 외국도 아닌데요, 뭐. 한두 시간이면 ‘서울역’까지는 갑니다. 그 뒤로도 네이버 지도가 있으니까 선생님 계신 곳에 갈 수 있어요. 늦으면 뛰면 되고요. 자주는 아니더라도 한 번씩, 선생님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올해는 그러기로 다짐했으니까요. 머지않아 우리 처음 만나기를, 또 한 번 닿기를 고대해 봅니다.
그때까지 우리.
밥 잘 먹고! 잘 자고! 살아요.
상경하고 보니
역시 대전이, 내 집이
제일 좋은 이 새벽,
이학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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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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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봄꽃이 만개하고, 다음날엔 비가 내리고. 요동치는 날씨를 보니 봄이 맞기는 하는가 봅니다. 하루는 여름 같고, 또 어느 순간엔 가을 아닌가 싶기도 한 이런 날엔 감기가 성수기이지요. 건강 유의하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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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이른 이야기이지만, 올해는 아마도 북토크를 하게 될 듯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가능한 한 자주, 여러 장소에서 하고 싶어요. 서울이든 대전이든 어디서든 선생님을 뵙고 싶어서요. 모쪼록 그날이 어서 왔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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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편지는 이번 한 번일 것 같아요. 초행이 아니니 앞으로도 제 속도에 잘 맞춰서 인사드릴게요. 오월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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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를 들으면 어쩐지 《딩》에 나온 ‘주미’가 떠오르곤 합니다. 같은 이야기를 담은 노래는 아니겠지만, 종종 그런 기분이 들어요. 유사점이 없더라도 선생님께 전하고 싶었고요. 이 밴드의 다른 노래도 그렇지만, 이 노래 정말 조크든요. 떠나는 사람과 남은 사람. 사람이 장소가 되는 일. 그리고 돌아가지 않아도 언제든 기댈 수 있는 곳. 그런 곳을 떠올리며 이 노래를 듣곤 해요. 우리 편지도 그러기를. 그럼 우리 인사하죠. 또 만나요. 꼭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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