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이십 분 거리의 동네서점에서 북토크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작가의 이름을 확인하니 입이 떡 벌어지더군요. 뵙고 싶던 분이었거든요. 오늘은 그분을 ‘참새’님으로 불러보겠습니다. 세상엔 어떤 이야기를 하든 믿어져서 이내 따르고 싶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게는 참새 님이 그렇습니다.
책과 소셜미디어 그리고 라디오를 통해 그분을 읽을 때마다 ‘아, 이 저자와 만나보고 싶다, 대화하고 싶다’ 느낀 적이 많았어요. 기대했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신청하려고 보니 모객이 마감됐더군요.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많다는 소리겠지요.)
며칠 뒤 늦은 저녁. 차를 타고 그 서점 앞을 지나는데 불이 켜져 있었어요. 독서 모임을 하고 계신 듯했습니다. 여럿이 모여 함께 책을 읽는 모습을 보는데 어쩐지 안심이 되고 내적 친밀감이 들더군요. 책을 애정하는 사람들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는지, 제가 신뢰하는 분이 다녀간 곳이라서 그랬는지, 이유는 몰라도 그곳이 더 가깝게 느껴졌어요. 그곳의 모두가 오늘도 무사하길, 안온하길, 바라기까지 했습니다. 이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에리히 프롬은 아니지만, 종종 사랑에 관해 생각합니다. 타인을 향한 모든 관심과 호의를 ‘넓은 의미에서의 사랑’이라고 믿는 편이에요. 우정은 사랑 안에 속한 감정으로 보고요. 세상은 두 가지를 줄곧 나눕니다. 저도 그래야 한다면 그럴 땐 배타성을 기준으로 합니다. 마음이 다수에게 향하면 우정, 특정 대상에게만 허용되면 사랑. 여기서 특정 대상은 ‘나’일 때도 있지요.
요즘은 어떤지 모르나 제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직장 체험’이란 게 있었습니다. 대학생 신분으로 특정 기관에 단기 파견 근무를 하는 것인데요. 저는 두 번 해봤습니다. 첫 장소는 한 초등학교. 스물 혹은 스물한 살쯤이었을 거예요. 방학이었고, 학교 행정실에서 컴퓨터로 자료를 입력하는 일을 했습니다. 오후가 되면 누군가 떡볶이나 빵 같은 간식을 사 왔어요. 기억력이 안 좋은 제가 그걸 기억하는 이유는 때마다 작은 소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정실에 간식이 도착하면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테이블 앞에 모여 앉아 그것을 먹었습니다. 저는 그러지 않으려고 했고요. 배가 고프지 않다, 속이 좋지 않다, 그런 핑계를 대며 호의를 거부한 것이죠. 실제로는 어울리기 싫어서 그랬는데, 그곳의 선생님들도 물러서지 않고 제 손에 젓가락을 쥐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사소한 소란이 일어날 밖에요. 같이 먹으면 그만인데 저는 왜 그랬을까요. 언제 떠올리든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억입니다.
두 번째 직장 체험의 장소는 종합사회복지관. 말씀드린 적 있던가요. 저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했어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대학에 다닐 적만 해도 가족이 아닌 아이들과 어르신들을 자주 만났다는 의미이지요. 해당 기관에서는 직장 체험에 이어 실습까지 했으니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오죽 많을까요.
한글 교실이나 댄스 교실은 물론, 각종 행사에서 어르신을 만날 때마다 살갑게 다가갔습니다. 함께 음식을 먹고, 춤추고, 대화하고, 웃은 날이 많아요. 누군가 가져온 간식조차 입에 대지 않으려던 시절과는 다르게. 복지사 선생님들과도 친해져서, 첫 번째 편지에서 말씀드렸듯 실습 마지막 날 한 분 한 분께 손 편지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은 제게 우정을 나눈 장소인 셈입니다.
두 일화를 통해 우정과 사랑의 차이를 설명해 보려고 해요.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면 우정이고, 닫으면 사랑이 아닐는지. 무슨 궤변인가 하면, 초등학교 행정실에서 저는 제 마음을 독점한 채 저만 ‘사랑’한 것이고, 복지관에서는 마음의 문을 열고 ‘우정’을 나눈 것이라고 봐요.
(좁은 의미에서의) 사랑이 대체할 수 없음에 역점을 둔다면, 우정은 좀더 많은 세계를 포용한다는 점에서 저는 사랑보다 우정을 믿는 편이에요. 물론 넓은 의미에선 전부 사랑으로 보이지만.
관계 앞에서 지금의 저는 어떨까요? 배타적인 태도는 사라졌지만, 그 공간에 ‘조심’이 자리한 것 같습니다. 저의 호의나 관심이 상대에게 폐가 될까 봐. 예외가 있다면 제가 좋아하거나 좋아해 보고 싶은 사람들 앞에서. 따져볼 것 없이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없다, 없어도 너무 없다, 팔 월말의 저는 그랬습니다. 급한 일을 얼추 마치고 달력을 보니 구월이 됐더군요. 그즈음 한숨 돌렸다면 좋았을 텐데 또 다른 일을 벌이는 바람에 바빠야 했습니다. 이런 얘길 아무 데서나 꺼내지는 않습니다. 세상에 안 바쁜 사람은 없고 그래서 엄살임이 분명하니 감출 때가 많아요.
편지를 쓸 때만 말합니다. 소중한 사람 앞에서는 평소와 달리 엄살 부리고 어리광 떨게 되지 않던가요? 그와 비슷한 마음이 아닐는지. 돌이켜 보면, 이 편지의 작가는 매번 약해지고 연해진 자기 마음을 폭로합니다. 그걸 읽은 독자는 지나치지 않고 한 존재를 발견해 주고요. 그 관계 앞에서 저는 묻습니다. 이것도 우정인가.
「고독에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어요. 선생님께서 메시지를 보내주셨어요. ‘고독’하면 이 편지가 떠오르신다면서 그 단어가 들어간 어느 책의 문장을 보내주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 편지는 저 혼자 독점할 수 없다는 것. 이 편지의 주인은 우리라는 것. 그것을 배운 뒤로는 우리가 하는 일이 우정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제 그랬듯 오늘도 저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반대로도 그렇습니다. 웃고, 농담하고, 이따금 조금 먼 곳을 바라보는 순간조차 그저 상상할 따름입니다. 그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긴 합니다. 덕분에 편지를 나눌 수 있으니까요. 독자가 없는 작가. 다른 말로 ‘혼잣말 전문가’는 고독하다 못해 외로운 존재임을 저는 모르지 않으니까요.
세상엔 직업이 독자인 경우도 있더군요. 읽기만 하는 존재라서가 아니라 해당 작품을 영상화하는 제작진이 그에게 조언을 얻는다고 해요. 직함과 보수도 있으니 정말 직업인 셈이지요. 그게 아니더라도 독자의 길에는 작가의 일만큼이나 충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압니다. 두 가지 모두 제 직업이니까요.
좀처럼 독자로 살지 못하는 시기가 길어지고 있습니다. 맛도 좋고 몸에 좋을뿐더러 주변에 자랑하고 싶은 음식을 집에 두고도 먹지 못한 적 있으신가요? 제가 그랬습니다. 음식이 아닌 책이었죠. 우스운 얘기지만 저는 책과도 우정을 나눌 때가 있어요. 얼마 전 좋아하는 작가가 신간을 냈길래 기쁜 마음으로 곁에 두었습니다.
읽는 건 미룰 수밖에 없었어요. 할 일이 좀 많았거든요. 눈치 보며 군침만 흘리다 결국 펼치고 말았습니다. 프롤로그만 읽자, 한 꼭지만 보자, 1부만 보고 덮자. 다짐이 계속 변한 데에는 책의 잘못도 있습니다. 너무 유혹적으로 ‘나를 안 읽을 거야?’ 노려보는 바람에 (비유입니다) 어쩔 수 없었어요.
그 책의 시작은 편집자의 제안이었다고 하더군요. 어떤 대상 안에 숨겨진 고유한 이야기를 발견하고 발굴하는 일. 훌륭한 편집자들은 대개 그런 일에 능하지 않나 싶은데요. 아직 세상에 꺼낸 적 없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책이 되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요?
일단 한 사람의 의지가 필요하죠. 그 뒤엔 상대에 관한 세심한 탐구로 이어져야 할 겁니다. 무언가 보인다, 더 보고 싶다, 오롯이 듣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들면 동행을 제안할 테고요. 그것을 상대가 동의할 때 비로소 책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저는 이것이 우정에 이르는 과정과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과거의 제가 복지관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 편집자가 저자에게, 저자가 책 속에 담긴 여러 선생님에게 그랬듯, 의지와 탐구와 동행의 과정을 거쳐 우정이 탄생하는 것이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저는 로맨틱한 관계를 지켜보는 일보다 우정을 나누는 장면을 보는 걸 더 좋아합니다. 얼마간 거리 둔 채 나란히 걷는 둘 사이에는 굳건한 신뢰와 서로 위하는 마음이 보이거든요.
사는 일은 기대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저는 작은 사람이라서 유독 애를 먹고요. 세상이 낯설거나 견디기 어려운 날에는 ‘이걸 어떡하지’ ‘오늘을 무사히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하느라 금방 늙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우정이, 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런데 넌 어때?’ 물어볼 사람만 있어도, 그러다 운 좋게 이해받기라도 하면 또 하루 부득불 살아가게 되니까요.
선생님, 어떻게 지내시나요? 요즘 기분은 어떠세요?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래도 된다면, 선생님과 우정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편지를 씁니다. 선생님이 오늘도 무사하길, 안온하길 바라며. 이렇게 책에 관한 이야기를 곁들여. 하필 왜 책이냐고요? 우정하는 선생님과 함께, 읽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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