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두 편의 답서에 기대 편지를 씁니다.
두 선생님을 호명할 이름이 필요하겠군요. 겨울에 어울리는 이름이었으면 해서 ‘엘사’와 ‘안나’로 불러 보겠습니다.
‘엘사’ 선생님. 하고 싶은 일이 있어 두 번째 수능을 보셨다고요. 저는 재수를 해본 적 없어서 정확한 기분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것이 ‘재도전’을 의미하는 일이라면 몇 자 보태볼 수 있겠지요.
입학이 아니라 졸업 후였어요. 사회로 나온 뒤, 정확히는 글 쓰며 산 뒤부터 매년 N수생의 기분을 겪었습니다. 성취를 갈망하며 시도와 재시도를 반복했지요. 가슴 뛰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우리의 심장이 그렇죠. 달려도 두근, 설레도 두근.
두 마음 중 전자의 비중이 높은 날엔 혼란스러웠어요.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무작정 달음박질하는 기분이라서. 사정을 모르는 지인들은 저의 ‘열심’을 응원해 주더군요. 대부분 큰 힘이 되었지만, 미안하게도 그렇지 않은 시절도 있었습니다.
엘사 선생님께서도 편지에 적어 주셨지요. 주변 사람들의 응원이 ‘통하지’ 않아서 부끄러우셨다고요. ‘통하다’를 사전에서 찾아봅니다. 그중 여기선 다음 두 가지 의미가 어울릴 듯해요. ‘서로 뜻이 잘 전해져 이해되거나 알게 되다.’ 그리고 ‘서로 이어지다.’
아끼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해와 이음이 불가한 상태를 저도 겪어 본 적 있어요. 첫 소품집 출간 직후였어요. 주변의 응원이 편하게 다가오지 않더군요. 특별히 날 선 반응을 보인 건 아니었지만, 애정 어린 응원 앞에서 안 쓰는 물건을 선물 받은 사람처럼 미적지근하게 굴었어요.
어떤 진의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발견되곤 합니다. 당시엔 몸과 마음이 지쳐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때 저는 ‘출간 우울증’을 겪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당시 써둔 글을 보고야 주변의 응원이 불편했던 이유를 알았습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래요. ‘응원에도 맞춤한 때가 있다, 때로는 응원의 말이 감당키 어려울 만큼 무겁게 다가온다.’
외부의 힘(지지)이 필요한 순간엔 혼자였어요. 한창 바쁠 땐 누군가의 응원을 받아도 ‘지금은 불필요해!’ 여기며 외면했고요. (보내도 받지 못한 거죠)
그렇게 달려가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또 다른 응원이 들려오더군요. 뒤늦게 다가오는(또는 인식되는) 응원의 말 앞에서 저는 모른 척했습니다. 반응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거든요. 가진 힘이 부족해 미래의 힘까지 당겨쓰고 말았으니 꽤 오래 그런 상태를 견뎌야 했고요.
더구나 ‘여기서 더?’하는 마음이랄까요? 충분히 달려왔는데, 응원받는 순간 힘내서 몇 킬로쯤 더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러지 못하면(혹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응원해 준 이를 다시 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난감했던 것도 같습니다.
무언가를 시도하거나 재시도하는 것. 그 과정을 온전히 겪어내는 건 당사자밖에 없지요. 응원과 조언, 위로가 필요한 순간도 남들은 알지 못하고요. 그러므로 엘사 선생님의 바람대로, 타인의 응원을 “삐뚤어진 마음이 아니라 온전히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내기란 어려울 밖에요. 그게 되는 순간이, ‘통하는 장면’이 그래서 귀하고 아름다운 것일 테고요.
이쯤에서 제가 만난 다정을 함께 봤으면 해요. 바로 ‘안나’ 선생님의 답서입니다.
“북토크 현장의 모습이 편지 곳곳에 남아 있네요. 실실 웃는 자신을 돌이켜보며 좋아서 웃었다고 고백하는 대목에서 미소가 났습니다. 그 웃음이야말로 진심이었겠지요. 긴 시간 꿈꿔 온 자리에 서서, 자신의 목소리로 작품을 말하는 일. 그날의 들뜸도, 그날의 웃음도 모두 학민님의 문장처럼 진실했을 테니까요.”
편지를 읽다가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어요. 이후에도 발행인을 감동하게 한 진심이 줄곧 이어지지만, 한 문단만 더 볼게요.
“저는 오히려 그 서투름이 학민님을 더 오래 기억하게 만듭니다. 완벽한 말보다, 흔들리며 내뱉은 진심이 훨씬 또렷하게 남는 법이니까요.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한다는 건 용기이고, 그 자리를 ‘좋아서’라는 마음으로 채운 사람은 이미 잘한 사람입니다.”
‘이미 잘한 사람.’ 네. 이 여섯 글자를 전하고 싶어서 안나 선생님의 답서를 빌려왔어요. 필요한 분이 계신다면 마음껏 가져가 주시기를. 응원은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응원하는 말 없이, 응원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을게요. 이 또한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살다 보면 별거 아닌 응원의 말이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 그때를 위한 예약이라고 해두죠.
응원을 온전히 받아내지 못하는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닐 거예요. 다만 상황이 내 마음 같지 않을 뿐. 성취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응원의 힘이 더해진다고 해서 희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일까요. 요즘 저는 이런 태도로 살아요.
되는 것 말고, 하는 것. 잘 사는 것 말고, 사는 것. 괜찮으면 혼자, 필요하면 함께.
이 변화 덕분에 마음이 제법 가벼워진 것 같아요. 이제는 꿈을 달려도 숨이 차지 않아요. 그전에 멈출 줄 알거든요. 또 사소한 일들로 두근거릴 때가 많아요. 모두에게 해당할 정답은 아닐 거예요. 다만 지금 저에게 맞는 방법일 테지요. 선생님께서도 선생님만의 방법을 찾을 수 있기를, 편해 지시기를. 내내 바랍니다.
온통 겨울이에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고요. 작년 이맘때 보낸 편지를 기억하시는지요. ‘Home sweet Home―크리스마스 고독에게’라는 편지였죠. 긴 터널 같던 무기력을 헤치고 나와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그 편지를 쓰고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해가 지났어요. 작년을 떠올리면 올해는 마치 다른 시간선을 살아낸 기분인데요. 다시 용기 내 이런저런 일들을 할 수 있던 건 작년 성탄에 저를 반겨 주신 선생님 덕분입니다. 돌아올 집이 있다는 게 이렇게나 좋네요.
엘사 선생님의 답서 중 유독 눈길이 오래 머문 대목을 전하며 인사드릴게요. “답답하고 걱정되는 마음을 일기장에 적기에는 영원히 남아 버릴까 봐 이렇게 서신으로 흘려보냅니다.” 선생님께 「고독에게」는 언제나 그런 곳이기를.
역시, 쓰기보다
읽기가 더 좋은 이 새벽,
이학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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