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일러 드린 대로 저의 신작 『파고』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 해요. (거기에 헌해 인사를 곁들인)
『파고』가 세상에 나온 지 보름이 지났는데요. 저는 그간 ‘책 인사’하느라 정신없이 다정한 시간을 보냈어요.
세상엔 만들지 않으면 부를 수 없는 말들이 있지요. ‘책 인사’도 그래요. 사전에 없는 단어이고요, 흔히 쓰는 표현도 아니죠. 필요해서, 만들고 불러요.
별 건 아니고 ‘책으로 전하는 인사’를 의미하는데, 그게 이 책을 만든 이유이기도 합니다.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생님께 인사드릴 명분이 필요해서. 늘 빈손이던 제가 무어라도 드리고 싶어서.
책을 잘 받았다거나 잘 읽었다는 인사를 들을 때마다 환대받는 기분이 들어요. 동시에 알게 되어요. 준 게 아니라 받은 거구나, 이번에도 나는 또.
나의 책이 누군가의 독서 기록물 중 하나가 되는 일. 시절을 담은 책을 주고서 그이의 시절이 담긴 책을 건네받는 일. 기도를 담은 문자와 응원하는 마음으로 써 내려간 감상. 그리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들려온 제안 앞에서 저는 다발성 감격 증상에 시달려야 했어요.
눈 밑이 필요 이상으로 촉촉해져서 조기 갱년기를 의심하는 중인데요. 뭐든 느린 제가 그거라도 앞서가니 좋은 일 아닌가 합니다. (농담이 섞였지만, 정말 감사하고 과분한 일들이지요 :)
김달님 선생님이 적어 주신 서문에도 나오는 “당신의 글을 잘 읽고 있다”는 말. 언제 들어도 반갑고 설레요. 언젠가는 무뎌지는 날이 올지 모르죠. 그러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두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니까. 자연히, 그런 날이 오기를, 그런 순간도 겪어 보길 고대합니다. 그땐 또 다른 형식으로 읽는 사람과 공명하게 되리라고 믿으며.
책 소개를 좀더 해볼까요. 『파고』에는 세 가지 이야기를 담았어요. 무기력을 짊어진 채 나아가는 이야기. 책을 읽고 쓰며 상실을 통과하는 이야기. 그리고 소외와 겨울을 주제로 한 이야기. 그래서 세 이야기가 어디로 향하길 바라는가. 자신을 믿는 일에 지친 사람들. 어둠을 등 뒤에 두고 내일을 걷는 사람들. 그런 분들께 가닿길 바랍니다.
저에게 이 책은 ‘긴 시간을 통과해 나와 화해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하나의 문을 여는 일’이거든요. 물론 읽는 순간 용기가 솟아나진 않을 거예요. 쓰는 동안 그런 기대를 품은 적도 없고요. 다만 읽다가 자신의 시절을 돌아보시고, 발견하시기를 바랐습니다. (내게도) 가물지 않는 바다가 있었지.* 그 발견이 용기 낼 계기가 된다면 저는 얼마나 좋을까요.
여기까지가 저자로서의 목표라면 창작자로서의 목표도 말해 보겠습니다.
더 읽고 싶은 작가로 기억되는 것.
(너무 큰 욕심일까요? 😂)
다들 그러셨겠지만, 올해도 바빴습니다. 출간을 준비하고, 취업 촉진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단편 소설을 짓고, 살아가기 위해 할 수밖에 없던 일들―일상과 사랑을 지속해야 했으니까요.
여백 없는 한 해를 보냈지만, 유난히 열심히 살지는 않았습니다. 해온 대로 했던 것 같아요. 다만 결과는 조금 달라요. 팔 년 만에 두 권의 책을 내놓았고, 책 인사와 북토크를 했으니 다른 해와 달리 손과 마음에 남은 게 있어요.
그건 전부 작년 연말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세운 이르고 촘촘한 계획이 현실이 된 거예요. 의문이 듭니다. 다른 해엔 무산되던 계획이 왜 올해는 가능했던 걸까요. 실력과 사정은 그대로인데 말이에요. 역시 인생은 살수록 모를 일인 것 같습니다. 그게 꼭 나쁜 의미만은 아닌듯하고요.
선배 저자분들로부터 책을 내고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는 소릴 많이 들었습니다. 첫 출간이 아닌 터라 저도 그 말의 저의를 모르지 않습니다만 오늘은 괜히 반박해 보고 싶군요.
달라진 게 많습니다.
생활은 그대로이지만, 그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이대로 다른 인생을 살더라도 한동안 매달린 흔적이 남았습니다. 또 하루의 시작도 달라졌어요. 아침에 눈 뜨면 오프라인 서점 재고를 확인합니다. (이게 참 의미 없고 재밌습니다. 😁)
더 많이 팔렸기를, 훨훨 멀리 닿기를. 그런 기대보다는 잠시간 그런 기대를 해볼 기회가 있다는 게 좋습니다. 이제 더는 쓰고 싶은 게 없다고 고개 돌린 순간 비로소 이루어진 출간과 소감. 전부 신기하기만 합니다.
며칠 전 기사에서 인상적인 수상 소감을 보았어요. 연기로 먹고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는 내용이었는데요. 저도 비슷한 마음이에요. 쓰고 싶은 글을 쓰며 살 수 있다면.
잠시 후면 새해이군요. 1월부터 할 일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고요. 해야죠. 분명 파도가 다가오겠지만. 다시, 기대 없이 순전하게. 휩쓸린 채 나아가야겠죠.
선생님은 어떠신가요? 올해 하려다가 못한 일이 있나요? 미뤄둔 희망이 있나요? 그렇다면 헌해에 두고 가지 말고 여기, 고독에게 보내주시겠어요? 어떤 일은 쓰고 나면 내일의 목표가 되기도 하니까. 그게 ‘나’를 부추기는 힘이 될 때도 있으니까.
저는 이제 믿어요. 때로 과거가 현재를 돕기도 한다는 걸. 선생님의 새해에도 그런 순간이 오기를. 저무는 한 해 끝에서 간곡히 바라봅니다.
『파고』의 저자,
이학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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