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요소, 라고 했습니다. 그 서점 이름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있어요.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인데요. 전생처럼 아득합니다. 손꼽아 기다리다 지나간 일들이 무릇 그렇듯이요. 멀거니 흩어지는 날들을 가늠하다 편지에 담아 보내요. 우리의 서사에 남겨 두고 싶어서요. 저는 얼마나 다행인가요. 거기, 선생님이 계셔서.
그날 제가 서점에 간 이유는 출판 강연을 듣기 위해서였어요.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과정을 출판사 대표, 편집자, 작가의 목소리로 차례차례 들어보는 일정이었는데요. 저에게는 흑심이 있었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을 보려는. 까만(黑) 눈에 동한 마음(心)이 있었지요.
출판사 ‘난다’의 김민정 대표님, 유성원 과장님, 오은 시인님. 세 분을 만나고 싶어서 강연을 신청했다는 말이에요.
‘소외의 기분’이라는 제목의 브런치북에도 쓴 적 있는데요. 저는 지방에 살아요. (대전에서 혼자 살고 소주는 린입니다) 지방이 단백질보다 못한 취급을 받기야 하지만 여기에도 만나고 싶은 사람은 종종 온답니다. 서울만큼 기회가 잦은 건 아니지만요.
지방의 문화 소외는 운운하지 않겠습니다. 아무렴요. 숱한 만남 앞에서 저를 소외시킨 건 다름 아닌 저였으니까요.
핑계는 많아요. 마치 그걸 수집한 사람처럼. 바쁘다고, (같은 도시인데도) 멀다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피해 왔어요. 오월에도 안희연 시인님이 대전에서 북토크를 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는데요. 고민 끝에 일정을 이유로 포기했어요. (후회, 하고 있어요 ♪)
이번에도 같은 선택을 하려는데, 문득 억울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더는 놓치고 싶지 않아서, 이러다가는 상실이 직업이 될 것 같아서 용기 내 강연을 신청했습니다.
서점 가기 전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여행 전날처럼 기뻐서, 설레서, 기다려져서. 그보다는 하루 사이 끝나버릴 작별을, 그 망연함을 이르게 느끼고 있던 것 같아요. 귀한 만남 앞두고 그런 기분을 느끼다니. 이상하지요. 그러게요. 미리 혼자를 상상하다니요. 이것도 직업병일까요. 여하간 확신은 있었어요. 좋은 시간이 될 거라고. 책을 빌려 말하자면 이런 의미예요.
“좋아한다는 건 다시 말해 신뢰한다는 것, 어떤 재료로 어떤 음식을 만들든 다 맛있을 거란 기대 속에 밥상 앞에 앉게 하는 엄마처럼 내가 즐겨 찾는 출판사의 힘 또한 그러함을 알았다.”(《각설하고,》, 김민정, 한겨레출판, 2013)
이제 그날로 가볼까요.
아름답고 쓸모 있는 책을 만드는, 그래서 제가 보고팠던 이름들을 만나러 가요. 버스가 서점에 가까워지고 있어요. 마음이 두근두근합니다. 정류장에 내려 육교를 오르고 내려요. 이제 서점 앞이에요. 찰칵. 사진 한 장 찍고 돌아섭니다. 약속 시간까지는 삼십 분이나 남았으니까요. 오랜만에 간 그 동네를 골목골목 헤맵니다. 발길 따라 시계추가 오가고. 강연 시작 십 분을 남기고 서점에 들어갑니다.
저는 (너무 자주 말하지만) ‘시인’의 산문집을 애호해요. (처음 밝히지만) ‘시인’을 ‘난다’로 바꾸어도 됩니다. 좋아하는 것을 만드는 분들을 좋아하는 일은 저의 오래된 취미이고요. 그분들이 지금 눈앞에 있어요.
공연장도 축구장도 가봤어요. 유명인을 만난다고 놀라는 편도 아니고요. 그런데 지금은 다르네요. 꼼짝없이 시골 쥐가 되어버렸습니다. 신기하고 반가워서 감격해요. 63빌딩을 처음 본 사람처럼. 뭍에 처음 나온 섬사람처럼.
글 쓰다가 막힐 때면 난다의 인스타그램 영상을 봐요. 눈 오는 겨울에도, 장마지던 여름에도 종종. 비록 영상 안의 소리지만, 책으로 만나온 분들의 육성을 듣고 나면 위태롭던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더군요. 마치 선생님이나 선배를 만나고 온 것처럼요.
글을, 책을, 시를 이토록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 세상 어딘가에 있구나, 알게 해준 분들. 그분들을 직접 만났으니 저는 오죽 놀라고 좋을까요.
십 년 넘게 ‘쓰는 사람’으로 살아오면서 ‘쓰는 사람’을 직접 본 적 없어요. 글쓰기를 전공하지 않았고, 업무는 우편과 온라인을 통해 진행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날의 저는 처음으로 잠시간 유일하지 않을 수 있던 겁니다.
강연이 시작되었어요.
서라벌예대 출신(아님) 대표님과 일을 정말 잘하시는(사실) 과장님과 시를 발견하기 위해 늘 긴장하며 산책하신다는 시인님의 강연을 연이어 경청했어요.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과정을 듣다가 출판사 대표와 편집자와 저자의 역할 중 저에게 어울리는 역할은 무엇인지 가늠해 보았는데요. 셋 중 무엇도 잘하거나 잘 아는 게 없지만, 어쩐지 저는 편집자에 가까운 자아로 살아온 듯해요. (타인의) 문장을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것이나 혼자서 수정과 책임을 감당해 온 점에서요.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요. 저는 ‘협업의 지휘자’인 편집자가 고독한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틀리면 안 되는 것. 책임을 짊어지는 것. 무엇보다 최선을 선택하는 것. 그것은 끝내 인간을 혼자로 만드니까요.
듣는 일도 혼자의 일이지요. 함께 들어도 이해와 감응은 일 인분이라서요. 화장실에 간 것처럼 한 칸씩 자리 차지하고 하는 일이지요. 반응도 제각각이에요.
강연을 들으며 저는 내내 혼자, 속으로, 무릎을 탁! 치면서 대답했어요. ‘아! 그 이야기 기억나요’, ‘선생님은 종이에 진심이시지요’, ‘어떻게 지구인이 옹기종기를 모르겠어요?’
익숙한 내용이 많았거든요. 책과 기사와 인터뷰에서 읽거나 본 것들이요. 새로운 사실과 전해주신 정보에도 고개를 끄덕였고요.
충만한 오후 끝에 저녁이 왔어요. 헤어질 시간입니다.
시인님의 사인을 받고, 저는 잠시 서서 그곳을 돌아보았습니다. 다섯 시간 넘게 앉아 있었더니 피곤과 허기가 몰려오네요. 그런데도 머무르고 싶어서 얼른 출구로 향했습니다. 사인 줄도 남았으니 몇 분쯤 더 머물러도 될 터인데. 서점에 갔으니 책도 사고 더 들여다봐야지 했는데. 도망치듯 나와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장소가 사라지는 장면을 지켜보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곳엔 강사분들의 긴장과 열정. 지켜보는 이들의 설렘과 환대. 조심조심 배려하는 서로 앞에 피어오르는 미량의 열기, 꽃 같은 불꽃. 그런 것들이 있었어요.
그런 장소여서, 일상에서는 한 번도 부리지 못할 주제의 이야기를 오후 내내 부릴 수 있었고요. 이야기가 끝나자 장소가 사라지는데. 저는 그 장면을 감당하지 못한 거지요. 그러나 선생님, 저는 행복했습니다. 의자에 앉아 듣고 배운 게 전부이지만, 그곳에 있었다는 게, 제가 그 장면의 일부였다는 게 흡족하고 기뻐요.
가길 정말 잘했어요.
선생님께서도 미루지 않으셨으면 해요. 무엇이든, 결국 사라진다 해도 겪으시길.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가졌다가 잃는 것과 가질 기회조차 놓치는 건 다를 테니까요. 이 호언도 허언이 될 수 있겠지요. 시간 앞에서 무엇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저의 변덕도 의심스럽습니다.
어쩌면 저는 두 번 다시 쓰는 사람을 볼 수 없을지도 몰라요. 여전히, 만나지 않고 만나는 게 익숙하거든요. 그게 저의 일이기도 하고요. 말로 하는 표현엔 익숙한데, 발로 하는 이음엔 서툴러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만 함께 살아와서 그런 것도 같아요. 마치 유령처럼요.
별안간 기억 하나가 떠오릅니다. 십 년도 더 전에 제가 참여한 책이 있어요. 저는 거기에 필명을 썼어요. ‘유령’이 들어가는 단어였지요. 선생님, 이래서 이름을 잘 지어야 하나 봐요. 유령이 사람을 만나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누가 알았겠어요?
만남 앞에서도 작별을 먼저 떠올리는 저는, 누군가 만나는 일이 헤어지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재회 없이도, 아니 만난 적 없어도 관계의 서사는 이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조금 다른 형식으로. 지금, 우리처럼요.
점점 쌓여가는 우리의 서사를 떠올리다 자주 웃는 요즘입니다. 선생님, 어디서든 건강하셔야 해요. 저는 염려 마시고요. 이렇게 유월의 첫 편지를 마칩니다.
이제 전송 버튼을 누를 거예요. 많은 게 사라지고 흐려져도 이 편지만큼은, 편지에 담은 마음만은 차곡차곡 쌓이길. 서로가 어디 있든 닿을 만큼, 멀리 널리 이어지길. 누르면 이루어질 거라는 듯이, 딸깍.
신난다 재미난다 더 게임 오브 데스
방금 흥얼거렸다면 우리는 친구
멀리서 선생님의 잔을 채우는 이 새벽,
이학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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