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지에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 가져갈 단 하나의 기억을 선택해 달라고요. 반응을 보니 모두 고민이 많으셨던 것 같더군요.
저는 안도했습니다. 선생님들의 답변은, 소중한 기억이 없어서가 아니라 여럿이라서, 하나만 선택할 수 없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저의 대답이 그랬듯이요.
우리가 지나온 세월에는 지난하고 서글픈 날이 많지만, 오래도록 기억하고픈 순간도 있다는 것. 그것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 얼마나 다행인가요.
보내주신 답변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겪은 하나의 기억이 아니라 두 사람에 관한 기억을 가져가고 싶으시다고요.
함께 보낸 추억이 생생히 떠오르지 않더라도 소중한 시절을 함께한 사람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번 생은 행복했고 즐거웠다고, 왠지 모르게 그렇게 느껴질 것 같다고 하셨어요. 얼마나 다정한 마음인가요.
선생님 덕분에 저는 또 배웁니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 기억되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기억, 하니 드리는 말씀인데요. 저에게는 간혹 찾아오는 꿈이 있어요. 아무도 저를 모르는 꿈이에요.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Spider-Man: No Way Home, 2021) 보셨나요? 결말에서 우리의 친절한 이웃 ‘피터 파커’(톰 홀랜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제 꿈속 상황도 그래요.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처럼 외형이나 종(種)이 변한 것도 아니에요. 저는 그대로인데 아무도 저를 몰라봅니다. (빌려준 돈은 이제 어쩌죠?)
꿈속에서 그것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저를 보는 그이의 눈빛이 달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는 사람을 보는 눈과 낯선 사람을 보는 눈. 그 차이를 감지하는 건 본능의 일인 듯해요. 그저 나를 바라보는데, 저이는 나를 모르는구나. 단번에 알겠더라고요. 마침내 저는 혼자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아무도 저를 모르기를 바란 적 있어요. 살아가며 한두 번쯤. 누구나 그러지 않던가요? 현실 또는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벗어나면 자유로워질 것 같으니까. 한 가지 이유가 더 있겠습니다.
저는 온라인 게임은 해본 적 없는데요. 키우던 캐릭터를 지우고,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알아요. 언제 그런 선택을 할까요? 그만두고 싶을 때가 아니라 새로, 시작하고 싶을 때겠지요. 우리가 세상과 사람에게서 잊히고 싶을 때도 그런 바람이 이유일 거예요.
막상 모든 이들과 초면이 된 꿈속의 저는, 무엇도 새로이 시작하지 못합니다. 소중한 사람들이 저를 모르니까, 그 사실에만 얽매여 버리고 맙니다. 하나도 자유롭지 않아요. 아득하고 답답하고 서글퍼요. 세상에 혼자가 된 기분은.
그중 가장 무연한 순간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저를 설명해야 할 때였습니다. 요컨대 저는 면 요리를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당신이 만들어 준 국수를 제일 좋아하는데, 그걸 모르는 당신에게 설명하다가 울음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이래서 베개는 방수 기능이 필수입니다)
제가 선택한 잊힘이라면 조금 달랐을 것 같아요. 의지와 관계없이, 아무런 준비 없이 잊히니 너무 막막하더라고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피터 파커가 그랬듯) 아주 가깝고 귀한 몇 사람만큼은 저를 기억하게 해달라고 할 것 같아요. 저는 여기 있지만 다른 사람 안에도 제가 있으니까. 그것이 한데 모일 때 지금의 제가 될 테니까요.
아는 사이가 모르는 사이가 되는 일은 현실에서도 종종 일어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멀어지는 관계가 많지요. 멀어지고서 세월이 더해지면 이제 우리는 모르는 사이가 되고요.
다시 마주한다 해도 이전처럼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막역하던 관계라도 그렇습니다. 서로가 곁에 없던 시간을, 그 공백을 채우는 일은 의지만으로는 할 수 없기 때문이겠습니다. 다만 재미있는 것은 그것이 타인이 아닌 나와의 관계에서도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저도 저를 모르는 채 살아간 적이 있습니다.
사람 속에서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꼬리 흔들며 다가가는 강아지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반겼고, 빛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소란을 즐겼습니다. 그런 제 모습이 저의 참모습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의 저는, 인생에서 가장 위태로웠습니다.
자주 방황했고, 남은 후회가 많아요. 다른 사람들을 만나느라 정작 저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바람에, 저를 모른 채 살아서 그렇습니다. 고독, 하지 않아서 그런 거지요.
고독에 관한 생각은 여럿이고, 자주 변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본연의 나를 마주하는 시간. 마주하며 대화하는 상태. 그것이 제가 인식하는 고독이며, 저는 고독한 순간을 통해 회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뒤에야 타인과 잘 지낼 수 있게 되는 것이고요.
회복 없이 사람을 만나던 그때는 일상처럼 누군가와 상처를 주고받거나 누구와 있어도 외롭곤 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제가 저를 모르니 행동의 기준도 명확하지 않았고, 저를 통제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제 인생에 제가 없는 기분이었습니다.
이것을 알고부터 저는 저에게 시간을 내어주려고 노력합니다. 종종 혼자 두려고 해요. 필요한 만큼. 그러는 동안에는 고독, 하려고 합니다. 스스로를 만나기 위해. 만나서 대화하며 회복하기 위해.
‘나와의 대화’가 항상 잘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외로워서 타인을 갈급하거나 서툴고 못난 제가 지겨워 저를 벗어나고 싶은 순간도 더러 있습니다.
그렇다고 갑자기 타인을 만나지는 않습니다. 나와 불화한 상태에서는 누굴 만나도 괴로워질 테니 말입니다. 차라리 책을 만납니다. 제가 문학을 공부하거나 부리는 이유는, 나와의 대화를, 고독을 더 잘해보고 싶어서 인지도 모릅니다. 방법이 무엇이든 저에게 고독은, 혼자 있고 싶어서가 아니라 타인 또는 세상과 잘 지내기 위한 시도일 테고요.
지난 편지에서 회복기를 보내는 중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그것은 몸의 사정이기도 했지만, 마음의 일이기도 했습니다. 고독 안에서 회복하며 편지를 쓴 것이지요. 그리고 염려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나을 수 있었습니다. 고맙고 미안합니다.
우리는 서로 모르지만, 잘 모르는 사이이지만, 저를 혼자 두지 않으려고, 사라지지 말라고. 답서로, 메시지로, 댓글로, 하트로 걱정해 주셔서 저는 아프면 안 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꾸 고맙습니다.
한 답서에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이름 옆에는 ‘「고독에게」 구독자’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마치 직업이나 소속처럼. 우리가 함께하고 있음을 증명하듯이. 그래서 편지를 읽기도 전에 눈길이 갔는데요. 그 길의 눈은 금방 녹아 흐르고 말았습니다. (엉엉 장마철이라서 엉엉)
비가 그쳐도 비가 고인 웅덩이가 말라도 잊지 않을게요. 비처럼 내려와, 가문 저를 일으킨 마음들을. 그러려고 이렇게 편지에 남겨둡니다.
얼마 전 한 선생님께서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고독’이라는 단어를 보면 제가 떠오른다고요.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잘 모른 채로 귀한 기억을 쌓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알건 모르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여전히 선생님을 안다고 말할 자신은 없지만, 저는 기억하고 싶습니다. 모쪼록 선생님도 우리를, 우리 나눈 편지의 시간을 기억해 주시기를. 제가 저를 잊을 때 선생님 안에 있는 저를 들려주세요. 저도 그럴게요. 선생님이 저를 잊을 때는 최선을 다해 저를 설명해 볼게요. 다짐과 달리, 혹 저에게 선생님이 희미해질 때. 선생님께서도 그렇게 해줄 거지요?
사랑한다면서
바라는 게 참 많은 이 새벽,
이학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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