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에 누워있습니다. 한 사람은 침대 위에, 한 사람은 바닥에 깔아 놓은 요 위에.
불은 껐고, 둘은 눈을 감고 대화합니다. 서로의 밤을 지켜주는 일이라도 되는 양 잠을 몰아내며 말을 계속 잇습니다.
오늘 겪은 일, 얼마 전 들은 재미난 이야기, 요즘 즐겨 듣는 노래, 보고 싶은 영화, 세상과 주변의 소식들…… 특별하지 않은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시간은 한가로이 지나갑니다. 따라 말소리가 잦아들자 숨소리가 방을 채웁니다. 누군가 먼저 잠든 것입니다.
침대에서 잠든 사람은 이제 막 꿈을 꾸기 시작했고, 요 위에 누운 사람은 그제야 자신의 꿈을 돌아봅니다. 자면서 꾸는 꿈과 살면서 꾸는 꿈이 나란히 누워 아침을 기다립니다. 밤은 깊었고, 우리의 감은 눈은 그보다 더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소중한 사람과 함께 겪은 어느 밤의 풍경입니다. 그 밤의 풍경이 떠오른 이유는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질문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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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잘 때의 꿈을 이야기해 주셨으니, 깨어 있을 때의 꿈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꼭 ‘무엇이 되고 싶다’가 아니라 ‘어떻게 살고 싶다’도 좋아요. 꿈을 향해 한 걸음 내딛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지만 나중에 보니 뒤로 걸은 한 걸음일 때도 있었고, 힘들어서 주저앉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시간이 앞으로의 방향을 정해준 적도 있어요. 선생님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진’ 선생님으로부터.)
‘어떻게 살고 싶은지’부터 말해볼게요.
우선, 어제보다 오늘 더 잘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어요. 그게 어떤 일이냐면요. 십 년 넘게 해 놓고도 서툰 일. 그래도 여전히 설레는 일. 매번 고통스럽지만, 고통 안에서도 즐거움을 만끽하는 일. 바로 글쓰기입니다. 계속 쓰며 살았으면 해요.
두 번째는 곁에 있는 사람들과 건강하게 살고 싶어요. 여기서 건강은 신체의 건강과 관계의 건강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에요. 아프지 않고, 시간 내어 즐거운 순간을 함께 보내고, 맛난 것도 같이 먹고. 미움 없이, 가끔 미워도 상처 주지 말고. 실수처럼 상처 줘도 잘못을 구하고 용서하면서. 그렇게 애틋하고 건강한 채 어울려 살길 바라요.
마지막은 우리 사는 이곳, 사회에 관한 바람이에요. 사회는 우리 삶의 바탕이지요. 바탕이 온전하지 않으면 꿈과 계획은 전부 무용할 테고요. 그러므로 지켜야 하는데, 저에게는 그럴만한 큰 힘이 없습니다.
다만 잘못된 일 앞에서 잘못되었다는 당연한 소리를, 정확히 말하는 게 제 일인 듯해요. 책·영화 기사를 쓸 때 사회적 연결을 시도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최소한, 사회에 필요한 최소한의 선마저 사라지지 않도록 계속 신경 쓰며 살아가려고요.
여기까지입니다. 내 일과 곁의 사람들과 우리 사는 사회. 세 가지를 아끼고 지키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제가 바라는 인생의 형식이겠습니다.
커다랗고 특별한 꿈을 좇는 분들에겐 소박하고 평범해 보이겠지요. 저절로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실지도요. 저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쉬운 일이 아님을 매일 느껴요. 아시겠지만, 평범을 누리기 위해선 무수한 비범의 과제를 해내야 하니까요.
지금 제 앞에 놓인 과제도 여럿인데요. 꿈에 관한 지금의 과제는 단 한 가지. 문을 여기는 것입니다. 저는 등단하거나 공모전에 당선되거나 단독 저서를 출간하거나. 그런 보통의 진입을 하지 못했습니다. 문을 연다고 다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열어야만 시작되는 것도 있겠지요. 다음 과제를, 고민을, 고통을 겪고 싶어서 문을 두드리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너무 힘들지 않냐는 말을 종종 들어요. 그렇다고 대답해 본 적은 없고요. 세상엔 저보다 힘든 분들이 정말 많으니까요. 힘들지 않았다고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저와 멀어질 것 같아서요. 유일한 목격자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면 그 시간은 무의미해질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니 절충해서 다들 겪는 정도로 힘들었다고 말하곤 해요.
그 시간을 지나오며 다른 문을 열어야 하나 고민한 적 있는데요. 지금은 한눈팔지 않습니다. 후회할 시간도 주지 않고요.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요. 다른 삶을 기웃대거나 좌절하는 데 너무 많은 세월을 허비했거든요.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한 고민. 그리고 소중한 글 인연을 찾고 맺는 것. 오늘은 그것만 생각합니다. 다가올 내일에는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아요. 두 가지 태도의 비율이 같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판단하든 함께 좇아오더군요. 소주와 맥주를 1대 1로 섞어 마시는 일처럼. (그러나 우리 그렇게는 마시지 않기로 해요)
매번 ‘계속, 하다 보면 결국 열릴 거야’하는 기대와 ‘아무리 해도 열리지 않을 것 같아’하는 예감이 동시에 드는데요. 낙관과 비관의 협업을 오래 지켜보며 내린 지금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열지 못해도 돼. 그래도 계속할 거야. 할 수 있는 데까지. 할 수 없을 때까지.
그런 채로 쓰는 삶이 끝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요. 그렇게 되어도 어쩔 수 없겠지요. 이미 문 앞에서 누린 게 많으니까. 계속, 쓰는 시간을 보냈으니까. 오히려 감사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세상엔 이만큼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고 마음이 항상 평온한 건 아닙니다. 여전히 흔들리며 살아요. ‘매일’이 ‘자주’가 될 만큼. 딱 그 정도 나아졌을 뿐이에요. 꿈을 걷는 일이, 여름 언덕을 오르는 일처럼 버겁게 느껴지는 날도 많습니다. 그런 날에는 미리 찾아둔 작은 행복 속 달콤함을 꺼내 먹어요.
김신지 선생님의 책 《평일도 인생이니까》(알에이치코리아, 2020)를 보면 이런 문장이 나와요. “이번 삶에서, 눈앞의 일상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최대치를 찾아야 한다. 그러니까 그런 게 존재한다면.” 제 삶에도 있더라고요. 최대치는 아니더라도 근사치쯤 되는. 구태여 찾지 않아서 모르던. 눈앞의 일상에서 찾은 작은 행복. 그것을 저는 ‘꿀’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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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꿀이란 지금 나를 달콤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의외로 일일 때도 있고, 영화나 음악, 축구와 게임 같은 예술과 취미도 포함된다.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만남도 빼놓으면 섭섭하다. 볕 좋은 날 빨래 널기도 좋아한다. 꿀은 액체라서 그런지 꿈보다 유연하다. 형체가 시시때때로 바뀐다. 그때그때 꿀이 되는 것을 찾아 먹으면 꿈이 주는 슬픔도 이겨낼 수 있다. (‘꿈 대신 꿀로 삽니다’ 중에서)
기년 전 이 글을 쓸 즈음부터 저는 저를 편하게 또는 웃게 해주는 꿀을 찾아두는 습관을 들였습니다. 꿈과 생활이 병들 것 같으면 얼른 그것을 꺼내 먹었고요. 그렇게 견뎌온 걸 보면, 꿀에는 굉장한 효과가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꿀을 팔려는 건 아니고요) 사람을 만나도 꿈 대신 꿀을 묻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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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무엇이 되고 싶니?” 말고 “지금 너를 달콤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니?” 물었으면 한다. ‘미래’ 대신 ‘요즘’을 물어봐 주면 더 좋겠다. 이런 질문이라면 머릿속으로 단어와 표현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지 모르니까. 슬픔도 부끄러움도 없을 테니까. 달콤한 것들을 떠올리는 동안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올 수도 있다. 사람을 웃게 한다는 건 어려운 일. ‘요즘 꿀’을 물으면 그게 될지도 모른다. (같은 글 중에서)
하지만 달콤의 힘을 빌려도 해결되지 않는 어려움은 많습니다. 세상은 친절하지 않고, 꿈의 길을 걷는 일은 누구에게도 녹록지 않으니까요. 그런 순간에는. 그러니까 지치고 힘들 땐 (짝) 내게 기대 (짝) 언제나 네 곁에 (짝) 서 있을게 (짝) 혼자라는 (짝) 생각이 들지 않게 (짝) 내가 너의 손 잡아줄게* ♪
뜬금없이 시작되는 노래
국내 최초 발리우드 뮤지컬 뉴스레터
〈고독에게〉를 쓰는
이 새벽의 드림(Dream)
: 계속, 쓰기.
농담처럼 노래 가사를 인용했지만 그래도 가끔은 누군가 기댈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꿈을 걷는 길에서 겪는 어려움. 고독들. 그런 것들을 나눌 사람과 장소가 있다면 조금은 덜 힘들지 않을까 하거든요. 저도 그게 절실했던 적 많고요.
이 뉴스레터도 그런 장소가 되었으면 합니다. 발행인이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어리석어서 해결해 드릴 수 없지만 들어드릴 수는 있으니까요. 지금 이 편지를 읽고 계신 선생님처럼, 아무 이유 없이 내 꿈의 편이 되어주는 곳. 그곳이 제가 ‘되고 싶은 무엇’입니다.
마음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계속 무언가를 희망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저는 그 사실에 조금 안도합니다. 현재의 꿈이 ‘나’의 전부인 것 같다가도 그게 아님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다음이, 다음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부디 우리는 희망할 수 있는 한 계속, 희망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희망에 바람을 불어넣어 줄 목소리가 있습니다. 오은 선생님의 산문집 《다독임》(난다, 2020)에서 읽은 한 선생님의 사연인데요. 오늘은 그것을 전하며 끝인사를 드립니다. 다음 편지로 만날 그날까지 무탈하시길. 총총.
“저는 올해 예순여섯 살입니다. 어느덧 할아버지가 되었지만, 제게는 아직 장래 희망이 있습니다.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주위의 도움을 많이 받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할 수 있는 만큼 베풀고 작은 것들에 귀기울이고 마음을 내주는 게 제 장래 희망입니다.”
꿈꾸는 사람들이
계속, 꿈꿔도 좋은 세상을
꿈꾸는 이 새벽,
이학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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